
재단은 오는 9월 22일 설립 15주년을 맞이한다. 설립 당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중국의 동북공정 등 주변국의 역사 왜곡이 심각한 외교 현안으로 떠올랐다. 우리 정부와 국민은 역사 왜곡과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응할 전문 연구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설립 15주년을 맞아 재단의 책임과 역할을 겸허히 살피고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계기로 삼고자 김용덕 초대 이사장(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과 함께 재단의 설립 배경과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향후 재단의 발전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재단 설립 축하연에 참여한 노무현 대통령(2006.9.28.)
이영호 바쁘신 와중에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단 창립 15주년을 맞이하여 초대 이사장님을 모시고 재단 설립 초기 운영과 앞으로 우리 재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재단의 설립 과정이나 배경, 재단의 초기 위상과 역할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연혁을 보면 2003년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일이 발생해서 2004년 3월 1일에 고구려연구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2005년에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2월 22일을 소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켜 독도 영유권 주장을 노골화했습니다. 이에 전광석화처럼 노무현 대통령께서 2005년 3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전담 기구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곧이어 4월에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이 출범했습니다.
2006년 5월에는 고구려연구재단과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을 통합하는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됐는데, 무려 1년 동안 굉장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이 법이 통과된 후 9월 22일 재단 설립 인가를 받아 9월 28일에 현판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날 대통령께서 재단에서 열린 축하연에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들은 공식적인 기록에 적힌 과정들인데요. 설립 과정에서의 고충이나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이야기 같은 게 있으시면 추억 또는 역사의 기록으로써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용덕 솔직히 저는 이사장 제안을 받을 줄 전혀 몰랐어요. 당시 설립준비단장은 청와대 정책실장 김병준 씨였고, 부단장은 유광석(재단 초대 사무총장) 씨였어요. 다시 말해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가졌고, 청와대 정책실장이 단장이니 얼마나 대단한 기구입니까? 당시 제가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을 할 때였는데, 제 친구인 김석우 대사가 “유광석이라는 후배가 널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곧 설립될 재단에 대해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내가 지금 국제대학원장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는데 그런 걸 뭐하러 하냐.”고 했어요.
어쨌든, 저도 그때부터 재단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청와대에서 재단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한 것이 제 뜻과 어느 정도 맞더라고요. 역사 갈등 문제는 싸워서 푸는 방법이 있고, 진실을 밝혀서 오해를 푸는 방법이 있습니다. 평소에 저는 동북아 역사 현안을 역내 특수 상황으로 보고 해결에 급급하기보다는 세계 역사의 보편 상황으로 확대하면 역사 갈등을 넘어서 평화로 나아가고, 현안들을 확실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쟁 책임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인류 보편의 이슈로 전환할 수 있고, 국제 사회의 동의와 지원을 끌어낼 수 있거든요. 그런 게 우리 재단의 일차적인 목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실 동북아는 역사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할 뿐 해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국지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국내외적으로 권위 있는 연구기관이 되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수준 높은 연구기관을 지향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이영호 실제로 진행 과정을 보면 연구와 전략, 이 두 부분이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장기적, 종합적인 연구 분석’이냐, 아니면 ‘체계적, 전략적 정책 개발’이냐. 이 두 가지 문제는 지난 15년 동안 계속 논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구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용덕 출범 당시에는 한·일 역사 문제를 연구하는 제1연구실과 한·중 역사 문제를 연구하는 제2연구실, 영토·영해 관련 문제를 연구하는 제3연구실(후에 독도연구소로 정식 개소)이 있었고, 전략기획실장은 외교부에서 파견된 국장급이 담당했습니다. 사실상 연구와 전략, 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사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 예를 들어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에 우리가 감성적으로 대응하고 한을 풀려 한다면 다른 나라가 보기에는 억지를 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국내외에서 우리 재단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재단 본래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만큼 이 문제는 설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 의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호 재단 설립 초기는 ‘전략’을 굉장히 중시한 시절이어서 연구 결과를 정책과 전략 개발에 많이 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실 고구려연구재단과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이 확보한 연구인력을 재단이 흡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그 인적 자원은 우리 재단이 현재까지 오게 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지금의 동북아 역사 문제를 해결할 전문적 권위를 갖고 있는가, 이것이 제가 부임하면서 느낀 과제 중 하나입니다.

김용덕 저는 연구위원은 물론, 행정직원도 모두 연구자가 돼서 재단이 하는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초에 그해의 연구 과제를 한 가지씩 제출하게 했고, 후반기에는 그 내용을 발표하라고 했지요. 매주 ‘수요포럼’이라는 이름으로 내부 세미나를 열었어요. 연구 주제를 명확히 하고, 연구의 지속성이 쌓이면 재단에 저력이 생깁니다. 어느 누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즉각 답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역량이 부족한 부분은, 어떤 분야를 오래 연구한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 역시도 우리 재단이 컨트롤해야지, 외부에 연구비를 지급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 방향은 우리 재단이 설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문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이영호 말씀을 듣고 보니 연구냐, 전략이냐를 이분법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역사 문제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정책 개발’, 즉 연구와 정책의 일체화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재단이 다른 연구소와 다른 점은 동북아 역사 문제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지난 15년간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아 왔습니다만, 이제는 동북아 역사 문제를 해결할 정책적 대안을 얼마나 만들어냈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에게 제기될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용덕 저는 어느 정도 연구 결과를 달성했어도 꾸준히 검토하고, 다시 자료 발굴에 힘쓰고,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게 정책적 대안을 빨리 만드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난 15년간의 결과가 뭐냐고 물으면, 우리가 만들어낸 성과를 정리해서 보여주시면 됩니다. 우리 재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구와 성과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이영호 재단 설립 초기에 진행하신 국제적인 네트워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용덕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물론이고, 이 두 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 몽골, 베트남,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학술 교류를 통해 연대망을 구축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중·일 세 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지요. 대가들의 호응도 컸습니다. 당시 우리 재단은 미국이나 유럽 학자들을 회의에 초청했는데요, 그분들을 통해 역사 갈등 해소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사 연구 기반을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각 나라 역사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들과 함께 대화하고, 합의를 이끌 기회가 있다는 건 우리 입장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의의가 있으니까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구 학계에 한국 고대사와 고고학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진행 중인 한국사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것도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 다양한 연구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의 서구 학계에서 통용되었던 한국사 오류와 왜곡을 바로잡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영호 재단의 엠블럼 제작에 대한 소회를 밝히셨던 적이 있는데, 엠블럼의 모양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의 의미를 담으신 건가요?
김용덕 처음에는 재단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내도록 했는데,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그다지 많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아시아’를 뜻하는 한자 ‘亞’ 위에 지붕을 얹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의 모양은 당시 고구려 미술을 전공한 연구위원이 제가 떠올린 구상을 형상화한 거예요. ‘亞’ 자를 활용해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지붕을 떠받치는 형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땅을 상징하는 갈색과 황토색, 숲을 상징하는 녹색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인의 자연 정신을 표현했지요. 이는 동아시아인 모두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와 연구위원들이 함께 만든 엠블럼이 어느새 15년이 지나 재단의 전통이자 상징이 되었으니 큰 보람을 느낍니다.
동북아역사재단 로고
이영호 이제 국회나, 시민사회, 학계, 언론이 우리 재단에 요구하는 역할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용덕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겉도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국제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좀 더 적극적으로 갖추고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한·중·일 문제나 한국사 연구에만 머물지 말고, 해외 학계와의 접촉을 넓히고 동아시아사를 포괄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재단이 국제적으로 공신력을 얻고 무게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영호 오늘 해주신 말씀에 따라 재단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