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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S929
재단 15년 역사와 함께 한 고구려 연구
  • 김현숙,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졸본(卒本) 시기 고구려 역사 연구’ 학술회의(2008.12.22.)


두 건의 학술회의와 국내 몇 명 없던 고구려 박사 중 한 명

20037월 국내 한 언론에 중국변강연구사지연구중심과 동북 3성이 함께 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2002년부터 진행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고구려사이고, 기본 논지는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학계와 정부, 일반 국민 모두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공작을 성토하였다. 그러면서 그간 소외학문에 속했던 고구려 연구자 현황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렸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고구려 연구자가 14명이라는 사실을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고구려 전공 박사는 그 숫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2003129일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중국에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 주장하며 근거로 제시한 내용들을 반박하는 학술대회였다. 필자는 그중 한 주제인 고구려 유민 연구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938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제1회 고구려국제문화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집안시가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말이나 자전거가 끄는 빵차가 공식 택시였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으며 압록강 건너편이 바로 만포시여서 출퇴근하는 북한 주민이 다 보였다. 남한과 북한, 연변대학 조선족 학자,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학자, 일본과 대만학자가 참여한 국제학술회의였다. 그때 껑톄화, 쑨진지 등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며, 문화 역시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발표를 했고, 그에 대해 남북한 학자들이 크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동북공정의 시작에 영향을 준 사건 중 하나였다. 이 두 건의 학술회의는 필자의 이후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재단 발간 고구려사 연구서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 모사도

 

 

동북아역사재단 설립과 새로운 출발

동북공정 문제에 대해서는 학계와 시민단체, 정부 모두 외교적 대응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역사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독립 상설 대응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져 20043월 고구려연구재단이 설립되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역사와 문화, 발해, 중국 근현대사, 한국 근현대사, 만주사, 백두산·간도, 러시아사 전공자들로 연구진이 구성되었다. 동북공정이 단순히 고구려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동북 3성 지역의 고대사와 현재, 미래와 관련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진을 구성했던 것이다.


고구려팀의 당면과제는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자의적인 해석과 주장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대응 논리를 마련하며, 올바른 고구려사를 국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관련 사업을 다방면으로 진행했다. 이중 필자가 직접 진행한 일은 다시 보는 고구려사발간이었다. 설립 초기여서 재단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구려 문제와 재단 활동을 알리는 명함 식으로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교양서였다. 건국부터 멸망까지 역사와 문화를 주제별로 나눠 10명의 연구자가 원고를 작성했다. 설립 후 7개월 만에 고구려 교양서를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재단 연구원은 물론 외부 연구자들까지 이 일을 최우선으로 했을 만큼 사명감에 불탔기 때문이다. 책의 전체 목차는 이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일반인들과 교양 한국사 수강 학생들이 읽기 쉬우면서도 고구려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문화적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픽식 고구려 대중서를 만들려고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922, ·, ·중의 동북아역사현안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상설 전담기구로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평화를위한바른역사정립기획단을 통합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이 설립되었다. 재단은 한··일의 전체 역사를 대상으로 역사 현안과 역사 갈등을 거시적 관점에서 연구하여 유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한·일 역사 문제를 담당하는 제1연구실, ·중 역사 문제를 담당하는 제2연구실, 독도 영유권 수호와 동해 표기 확산 등 영토·영해 관련 업무를 하는 제3연구실, 역사 문제 대응 전략과 정책 개발을 담당하는 전략기획실, 그리고 홍보실과 운영기획실로 구성하였다. 독도 문제가 심각해지자 2008814일에는 제3연구실을 확대 개편하여 독도연구소를 개소했다.


조직이 확대되고 설립 과정에서 교육부, 외교부, 해양수산부, 국방대학원 등 여러 기관에서 파견 근무를 나왔고 인원도 상당히 증가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좀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초창기에는 책상의 칸막이가 일반 공무원들의 그것처럼 낮아서 연구원들이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늘 책들에 둘러싸인 자기만의 공간에서 고개 숙이고 조용히 공부하던 연구자들에게는 고개만 들면 전체 사무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다 보이는 근무 환경이 아주 낯설었다.


재단 설립 후 필자가 가장 먼저 맡은 일은 동북공정 바로알기소책자 제작이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조선, 백두산 관련 중국 측 주장과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 논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동북공정의 추진 이유, 특성, 동북공정이 남긴 것, 우리가 해야 할 일, 동북공정의 사업 내용과 연구 결과물, 주요 일지 등을 정리한 홍보·교육용 소책자였다. 책을 만들기 위해 먼저 전체 목차를 짠 다음 제2연구실 연구원들에게 전공별로 원고 작성을 부탁했다. 총괄 기획 하에 원고를 의뢰했지만 문체와 문장의 호흡 등에서 차이가 많아 한 사람이 전체 원고의 균형을 맞추며 재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이 너무 개방적이고 부산스러워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설립 초기라 일도 많고 외부에서 전화도 많이 왔다.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전화 소리가 허공에서 부딪쳐 사무실 전체에 뒤섞이는 상태였다.

원고 제출일은 다가오는데 정신이 분산되어 글 작성이 힘드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 재택근무를 시켜주면 바로 정리해오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재택근무라는 제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개인 연가를 내서 이틀간 꼬박 앉아 머리에 넣은 기존 원고를 토대로 전체 글을 새로 작성했다. 그런 다음 필자들에게 보내 수정받고 재정리한 다음 출판을 했다. 이 소책자는 재단 홍보용 책자로 여러 곳에 보내졌고, 동북공정 특강이나 찾아가는 역사 등 여러 행사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동아시아의 지식 교류와 역사 기억’ 국제 컨퍼런스(2008.11.5.~6.)

 

재단의 고구려사 연구와 사업의 방향

동북공정 진행 초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된 분야가 고구려사였다. 재단 설립 이후에도 고구려 문제는 여전히 최전선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주력 분야 가운데 하나다. 중국과의 역사 갈등 문제는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겪었다. 동북공정 시작 단계만 하더라도 현재 중국 영토의 보존과 소수민족의 안정을 위해 중국인은 자고이래 하나였음을 강조하고 중화대가정中華大家庭 아래 모두가 단결할 것을 역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동북공정 소식이 알려지자 고구려사 귀속문제를 두고 한국 학계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 중국의 역사 왜곡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예상 밖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20048월 한·중 두 나라는 학술 교류를 통해 양국 국민의 이해 증진에 도움이 되도록 협력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두 양해 5개 조항에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재단과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사이에 매년 고구려 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중국의 초중고 교과서에 동북공정식 주장을 싣지 않기로 했고, 박물관이나 유적지 안내판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구절을 재단에서 찾아내 시정을 요구하면 수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이 빛을 감추고 자세를 낮춘 채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단계와 평화롭게 강해진다는 화평굴기和平堀起 단계에 해당하는 상황이었다.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대국굴기大國堀起를 부르짖게 되면서 이전과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중국은 이제 대국의 역할과 원칙을 강조하며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주창하고 있다. 애국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젊은이들은 그 어떤 시기의 중국인들보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국이 문화 대국주의를 추구하고 젊은 세대가 인터넷과 유튜브로 여론을 주도해가면서, 김치와 한복의 원조 논쟁 등 이른바 문화 원조논쟁이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주변국과의 역사 갈등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갈등이 학술 부문과 전문학자들의 영역에 한정되었는데, 이제는 일반인들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재단의 중국 관련 연구사업도 이전보다 내용이 다양해졌고, 다루는 영역도 확대되었다. 고구려 분야 연구사업도 마찬가지다. 재단에서는 고구려 관련 사업에서 일반인 영역까지 포괄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하고 있다. 고구려 연구사업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사 현안 분석과 대응’, ‘고구려사 정립을 위한 기반 구축’, ‘고구려사 심화 연구’, ‘올바른 역사 인식의 확산의 네 부분으로 나눠 추진하고 있다.


고구려사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토대가 굳건해야 한다. 이에 고구려사 연구를 심화, 확대할 수 있도록 기초 자료 구축 작업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왔다. 자료 원천적 왜곡을 막기 위해 유적 조사와 관련 자료 축적에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사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이 곧 중국 학계의 자의적 해석을 막는 선제적 대응이라고 보아 연구가 미진한 부분과 새로 주목해야할 분야를 중심으로 중장기 과제를 개발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등 한국의 고구려사 연구의 심화를 주도하고 있다. 연변대학을 지원하여 북한의 고구려, 발해 유적을 발굴 조사하고, 그 결과물을 출판하는 사업도 했다. 지금은 한국의 고구려 연구를 총 집대성하는 총 10권의 고구려통사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는 집단기억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재단 창립 단계부터 국내외에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교양서를 만들어 배포하고 국내,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해외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를 디지털로 복원하여 현장에서 상시 상영하게 했고,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전시하고 있다. 홍보와 교육 사업은 앞으로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연구 성과를 외국어로 많이 번역해 제3국 사람들이 우리가 쓴 고구려 관련 책을 더 많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 모두 갈수록 자민족중심주의가 강화되고 있고, 자국의 논리를 전파하기 위해 홍보전에 몰두하고 있다. 인구수에서 현저하게 뒤지는 만큼 우리는 더 전략적으로 우리의 논리를 강화하고 더 널리 전파해야 한다.


그런 한편으로 한중 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고구려사를 둘러싼 갈등을 학문 영역으로 소환해 학술적 차원에서 갈등을 해결해나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와 중국 모두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연구진들이 많이 늘어났다. 학문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술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고구려사 연구를 주도하는 층이 달라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방향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고구려사의 정확한 복원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늘려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본 고구려와 발해’ 순회 전시(2009)

 

에필로그: 기억에 남는 일 하나 더

2007년 북경에서 고구려 초기의 정치와 사회를 주제로 재단과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 학술회의를 했다. 갈등이 고조된 시기였기에 참석자들 모두 긴장된 상태에서 발표하고 토론했다. 다수가 참석한 회의였기에 시간 준수가 중요해서 발표 종료 시간이 되면 종을 울렸다. 토론 시간도 동일하게 부여했다. 그때 필자도 한 파트의 사회를 보았는데 우리 토론자가 발언을 조금 길게 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마칠 것을 요구했지만 그분은 꿋꿋하게 할 말을 다 했다. 그러자 중국 참석자들이 거세게 항의를 했다. 사회자가 한국 측에 발언 시간을 더 준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뭐라 할 수도 없고 난감했었다.


당시 연변대 교수들이 통역을 했는데 고고학 논문이 많아 전문 용어를 통역할 수 있는 분이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원로 학자가 연속해서 통역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통역 도중에 아이고 죽겠다!”라고 하셨다. 조선족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이 동시에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 중국 학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더 굳어졌다. 평상시 같으면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일이었고, 덕분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릴 수도 있는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이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면 오해가 더 쌓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오해는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결국 학술 문제는 자주 만나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간극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