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가 900회를 향해 가고 있다. 92년 1월 8일 시작한 수요시위가 17년째 계속 되고 있지만 일본 정 부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미루고 있다. 지난 3월9일 낮 12시, 857번째 수요시위 현장에서‘나눔 의 집’부설 역사관의 연구원인 무라야마 잇페이씨를 만났다. 낮은 목소리로 조근 조근 얘기하는 무라야마씨는 한국에서든 일 본에서든 보기 드물게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젊은이었다.
현재‘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나눔의 집’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참여 하게 되었는지?
2003년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피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일 학생들의 교류 프로그램으로‘나눔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증언을 듣는 동안 할머니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대로 일본으로 가버리면 안 되겠다구나 싶었다. 잘못된 일 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혼자서‘나눔의 집’을 찾아갔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006년 4월‘나눔의 집’연구원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는데?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귀국 직전 고 김순덕 할머니(당시 83세)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도 지켜보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 전쟁중 조선인 피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려던 계획이었는데, 그 즈음 한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나눔의 집 역사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야지마 쓰카사씨가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후임으로 일해 줄 것을 권유해 온 것이다.
‘나눔의 집’부설 역사관을 소개해 달라
1998년 설립된‘나눔의 집’부설 역사관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자료를 모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전쟁에 의한 여성인권 유린의 실상을 알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원의 일은 다양하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혼자여서 주로 일본인들의 예약을 받고, 방문자들을 안내한다. 전체를 둘러보는데 통역 시간을 감안하면 1시간 30분은 걸린다. 일부 여행사에서는 일본인 관광객을 모시고 오면서 관람 시간을 줄여 달라고 하지만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할머니들이 당하신 고통과 피해를 생각하면,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후원단체들과의 연락, 새로 발굴된 자료를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오래되어 빠진 내용을 추가해 전시물들을 리뉴얼 했다. 역사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보람이 컸다.
‘위안부’문제 해결은 일본 정부의 보상뿐만 아니라 한국 시민들의 관심 역시 필요하다고 했는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 정부나 시민들이 노력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눔의 집’이 운영하고 있는 역사관의 한국인 관람객은 2007년 4천여명에서 지난해에는 2천6백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반면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2007년 2천6백여명이 다녀간 데 이어, 2008년에도 이와 비슷한 2천3백여명이 관람했다. 작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국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위안부 사죄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적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있다. 장례식에 많은분들이 찾아와 조의를 표한다. 마지막 가시는 분에 대한 예의겠지만, 살아 계실 때는 왜 자주, 많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평소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최근 서대문 역사관 내‘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기공식이 열렸다. 일부 독립운동 단체와 유족들이 건립을 반대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위안부’문제는 일본인이기 전에 남자로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위안부’피해를 들었을 때 충격이 컸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분명히 피해자임에도 일본군‘위안부’였다는 점을 몹시 수치스러워하면서‘왜 하필 내가 거기에 갔을까?’하며 자학을 하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반성해야 하는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아직도 괴로워하는 분들은 피해자들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한 남성으로서 여성들을 어떻게 대했나”되돌아봤다. 일본군‘위안부’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여성관으로 일어나는 성범죄들, 전시의 성폭력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위안부’피해자들은 모두 누군가의 딸이고 누이이고, 어떤 남성의 사랑하는 아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실 분들이었다. 한국에서‘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반대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보편적인 오늘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꾸만 현재와는 상관없는 옛날일로만,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만 보려하고 피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눔의 집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만난‘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지난해 돌아가신 고 문필기(당시 83세) 할머니다. 1943년 끌려가 중국 만주일대에서 일본군‘위안부’생활을 하시다 2003년부터 나눔의 집에 계시면서 증언활동도 열심히 하셨던 분이다. 사람들이 찾아와 증언을 하시고 나면 밤에는 더욱 괴로워 하셨다. 실상을 알리는 일은 중요하지만 할머니들 개인들에게는 아픈 기억을 되새겨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일본이나 미국에도 가서 증언을 하시는 용감한 어른이셨지만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일본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다른 환자들에게는 밝히지 않으려 하셨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할머니는 내 이름 잇페이를 발음하기 어려워‘이빠이’라고 부르곤 하셨다. 중국에 오래 계셔서 말을 잘 못 알아먹기도 했는데, 할머니를 보며 중국어를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한일 교류에 관한 개인적인 소견과 앞으로 어떤 활동을 전개할 예정인지?
교류라고 해서 겉으로만 친해져서는 안 된다. 속까지 깊이 친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만나서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한다. 더러는 독도나 일본군‘위안부’문제 등 역사 갈등이 한일 교류에 지장을 준다고 우려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과거의 진실을 똑바로 보지않으면 진정한 교류가 어렵다. 일본인들은 한·일간의 역사문제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어서 잘 모른다고 하지만,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는데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안테나를 세워놓고, 문제가 있으면 피하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알게 되고, 역사 갈등 해결의 실마리도 찾게 된다. 한국에 올 때는 최소한 5년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언제까지 있겠다고 기한을 정해두고 있지는 않다. 아버지는 계속 있으라고 까지 하신다. 언젠가는 중국으로 가서 중국내‘위안부’피해자들을 만나고 관련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고 싶다.
무라야마 잇페이(村山一兵)
1980년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외국인 노동자 관련 단체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재일 한국인들과 비교적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도쿄의 호세이대(法政大)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2003년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으로 왔다.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현재‘나눔의 집’부설 역사관의 연구원으로 2006년 4월부터 3년째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