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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안과 밖의 시선'으로 찾는 3·1운동의 의미
  • 강은정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1919년의 세계사적 의의
강연회 사진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거의 1년간이나 계속된 항일 민족독립운동이다. 그러나 9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세월의 무게에 눌려 기억마저 희미해진 채, 매 년 이 맘 때 습관적으로 되뇌는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적혀 있다는“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과거를 다시 살게 된다”는 말 또한 함께 되새겼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각설하고, 이러한 망각이 빚어낸 갈증 속에서도 3·1운동 9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한 ‘1919년의 세계사적 의의’가 그것이다.

겅원즈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은 5·4운동은 중국이 근대 민족 개념을 자각하는 계기이자 중국의 봉건제도와 문화에 반대한 신문화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는데, 3·1운동이 중국 인민 특히 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진보 언론의 반향을 불러 일으켜 중국의 근대사회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마쓰오 다카요시 교토대 명예교수는‘다이쇼(大正)데모크라시와 3·1독립운동’에서 3·1운동이 벌어진 날, 일본 도쿄에서도 대규모 민중시위인 다이쇼데모크라시 운동이 발생했던 것과 관련해 두 운동이 정치 지배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운동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구는 기존에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미친 영향만 강조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 있는 지적일 수 있겠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민중운동세력의 성장과정과 일본의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다. 또 한국은 독립을, 일본은 민주화를 지향했다는 점과 다이쇼데모크라시 운동이 일본의 침략주의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차이점 등을 감안한다면, 3·1운동과 일본의 다이쇼데모크라시가 연관성이 있다고 성급하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계사적 의의’에서 3·1운동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제국주의 침략을 되받아치는 투쟁 대열의 선두에 섰던 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정부조직체를 중심으로 식민지해방투쟁을 벌인 국가는 프랑스와 폴란드 망명 정부 외에는 없었다는 특수성을 언급하며 3·1운동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토머스 녹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 교수는‘우드로 윌슨의 국제주의: 과거와 현재(1919~2009)’에서 윌슨 대통령이 전후 세계체제를 구상하며 제창한 국제주의와 그 후 100년 간 미국에서 쓰여진 윌슨주의의 이중적 이해에 대해서 소개했다. 토론 중에도 언급되었지만, 지금껏 3·1운동에 영향을 준 외부적 요인으로 항상 언급되어 왔던 민족자결주의, 그러나 이것은 패전국의 지배하에 있는 약소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이었기 때문에 전승국 일본이 강점하고 있었던 한민족에는 적용될 수 없었던 논리이다. 때문에 3·1운동 당시 조선인이 받아들였던 민족자결주의와 베르사유체제 때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가 오늘의 급선무일 것이다.

세계사적 의미와 함께 국내의 미시적인 연구에도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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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한림대 한림과학원장은‘베르사유체제의 역사적 의의와 한반도’에서 1919년 당시 민족자결운동은 세계 정치의 주변지역에서 일어난 세계화 운동으로“1919년 6월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이집트, 인도, 중국 등 제국주의 침략을 받던 국가들이‘잃어버린 민족자결권 회복’의 열망을 표출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세계사적 조류에 참여해,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베르사유체제의 수혜국이라 할 일본에 저항하고, 크게는 베르사유체제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제국주의에 도전했던 세계사적 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발표문을 통해, 3·1운동은 단순히 일제의 억압적 식민통치와 그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시 세계 사조로 등장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차 세계대전 후에 형성된 베르사유체제,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근대 민주화 운동 및 기타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세계사적인 사건’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연구방법은‘안과 밖의 시선’이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찾아 나가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종합토론 때도 잠깐 언급되었다시피 3·1운동이 세계사에서 어떤 위상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 미·중·일 등 정부와 그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 아직까지 국내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개인이나 지역의 역사를 조명하는 연구가 미진한 점을 생각한다면, 열린 세계사적 의미와 함께 국내의 미시적인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3·1운동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도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러한 연구가 일회성 기획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강연회에서도 3·1운동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았던 것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나 참여는 상당히 낮았다. 강연회의 결과물을 알기 쉽게 정리해 대중에게 소개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