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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
1909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조선 병합을 주도했던 초대 조선 통감이었다. 또한 그는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해 그들의 외교권을 침해했으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을 식민지화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주장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화로운 번영을 피력했던 안중근의 범아시아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병합 문제에 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하지만,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고종 황제 알현은 이러한 주장이 경솔하게 내려진 평가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고종 황제를 알현했을 당시 그는 “이 조약(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은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소. 하지만 이를 거절한다면 당신네 나라는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오”라는 말로 고종 황제를 위협했다. 이렇게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이후 1905년 12월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는 무력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악명 높은 경찰 체제를 수립하고, 조선의 무역 및 군사 체제를 장악하기 위해 충직한 조선 내각을 재편했으며, 조선의 반체제 인사들을 반인륜적인 고문으로 탄압했다. 따라서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상생의 범아시아주의 실현을 위한 안중근의 투쟁이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1990년대 초의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애국정신은 한국 국민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또한 미국 작가 님 웨일즈는 1973년 그의 저서 <아리랑>에 “중국 만주지역에 있는 많은 조선 청년운동가들이 한 학교 기숙사에 모여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열사를 비롯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의인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곤 했다”고 썼다. 중국 만주와 상하이에서는 안중근의 애국정신이 한국의 젊은 운동가들이 이끄는 수많은 평화적 독립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한반도에 있는 조선 백성들에게도 ‘계몽이 조선독립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안중근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 안팎에 있는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자신의 뜻을 펴고자 했던 안중근의 열망은 1910년 그가 쓴 글에 다음과 같이 잘 요약되어 있다. ¡°내가 조선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풍찬 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 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주시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조선백성의 대한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 간수에게 준 유묵 속에 나오는 ¡°나라를 위해 몸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위국헌신군인본분)¡±는 글귀는 오늘날 안중근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한국 육군의 모토로 남아 있다. [출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작성자 Mona [출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작성자 Mona
안중근은 또한 중국의 정치인들과 반제국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00년대의 저명한 중국 작가인 루 쉰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소식을 접한 후 “4억 중국인들이 수치심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적었다. 1930년대 만주지역의 유능한 통치자였던 장학량은 1927년 36개 초등학교에 수업시간 전에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던 반일 운동가 주은래는 반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우한성과 창사성에서 연극 <안중근>을 무대에 올렸고, 1900년대 중국의 지식인이었던 뤄난산은 자신의 글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중국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1911년 무창봉기에 큰 힘을 불어넣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정신은 일본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으로 인해 그의 숙적이자 호전적 제국주의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권력이 모이게 되었다. 아리토모는 곧 일본 내각을 장악했으며, 중국침략은 물론이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태평양 전쟁까지도 열렬히 옹호했다.
안중근은 동아시아의 공영을 꿈꾸었다. 그는 중국 뤼순에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창설할 것을 주창했으며 ‘평화 지역’ 마련, 공동 개발 은행 설립, 한¡¤중¡¤일 공동 화폐 사용 등을 구상했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는 오늘날의 EU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안중근이 꿈꾸었던 평화공동체 창설이 미래에 실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안중근이 동아시아 역사에 그어 내린 또 다른 큰 획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