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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현
조선이 35년의 비극적인 일본 식민통치기를 맞이하기 1년 전인 1909년 꺼져가는 저항의 불꽃을 살려낸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중근. 그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한 성인이었다.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탄을 쏘았을 때 그는 슬프고 절망적인 조선인들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온 동아시아인들을 대신해 쏜 것이었다.
안중근은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한 번의 의거보다 다층적인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현대 한국 최초의 순교자였으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진실과 정의를 믿은 선각자였다. 안중근은 전 세계 곳곳에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대에 동아시아의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1900년대 초 동아시아는 혼란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조선과 중국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중국은 1894년 중일전쟁 참패로부터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한일신협약 등 2개의 조약을 맺었다. 안중근이 이 거대한 정치적 폭풍의 눈을 파괴하려고 했던 점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반면 일본은 1850년대에 서방에 문호를 개방했다. 185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1868년에 메이지유신이 시작되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 의회가 만들어졌고, 서구식 사법제도와 행정 방식을 채택한 뒤 1912년에 끝났다. 일본은 정부에 의해 주도된 지속적인 산업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늘어나는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산업 생산 증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일본은 제국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고 가장 가까운 나라인 조선에 눈독을 들였다.
안중근이 동아시아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 같이 급진적인 방법을 선택한 동기를 이해하려면 그와 이토 히로부미가 가졌던 판이하게 다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중근은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제국주의를 막는 방벽으로 여겼다. 그는 동아시아의 번영을 실현하려면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를 없애야만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 신도로서 그는 고문과 차별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반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동아시아 사상은 일본이 산업국가로서 영향력을 높이는 데 바탕을 두었다. 그는 일본 주변국들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시장으로 보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른바 ‘동아시아공영권’에 대해 자주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조선과 중국이 일본의 발전을 보조하는 것을 말하는 겉치장에 불과했다. 그는 조선이나 중국이 잘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제국주의는 일본의 번영을 위한 열쇠였으며, 조선과 중국은 그 발판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하기 전까지 자유를 쟁취하려는 투사였다. 그는 조선에서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전역에서 일본군에 맞서는 독립군을 지휘했다. 조선이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에 다가가고 있었을 때 안중근은 제국주의로 인한 대혼란과 무질서로부터 동아시아를 보호하려는 그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국주의가 일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이 선호하는 주요 정책이었기 때문에 안중근의 혁명 정신은 어떤 나라가 한국을 장악하려고 하든 간에 여전히 그의 본성의 일부였으며, 어떤 유형의 제국주의적 접근방식, 특히 서방의 접근방식을 평등주의에 입각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자신의 이상에 대한 걸림돌로 간주했을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있었던 자신의 한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고 동아시아의 진정한 안녕과 평화를 위해 싸웠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암살 동기가 근시안적이고 오로지 한국의 독립에 초점을 두었더라면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미 그의 의거를 확인시켜주었고, 그의 말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염두에 둔 그의 의도도 확인된 셈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진보에 관한 안중근의 사상은 이것을 한국과 동아시아 간의 외교와 상호 관계를 통해 실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평등사상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을 주창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에 관계없이 한국이 발전해야 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러한 발전은 산업 성장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채택에 그가 실망한 이유는 이것이 한국의 산업 발전과 부에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랬던 것이었다.
안중근은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를 혐오한 진정한 혁명가였으며, 동아시아를 빈곤과 핍박이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였다. 제국주의에 맞서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의지와 희망을 갖고 그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이것을 동아시아인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