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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동아시아 역사에서의 안중근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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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ia Wong(黄惠婷)

2009년은 세계적인 사건을 기리는 중요한 기념일이 많은 해이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2차 세계 대전 발발, 1989년 천안문 대학살을 비롯해 그 해 세계를 바꾼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한국 국민들의 경우에는 애국지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의거가 100주년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역사에서 안중근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는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중국 혈통을 이어받은 필자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중국 역사의 관점에서 이 주제를 논하고자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 동북지역의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관계는 입술과 치아처럼 서로 의지한다는 뜻의 ‘순치상의’로 묘사되어 왔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뜻이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한 쪽이 공격을 받게 되면 다른 한쪽 역시 몰락했다.

일본 제국의 중국과 조선에 대한 팽창주의는 1800년대 후반 극명해졌다.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이 조선 점령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국내 세도가들과 외교 실세들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왕실과 제국주의 군대 사이에서는 그 시기를 놓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암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 통감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부 내에서 온건파에 속해 있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군국주의 강경파가 추진한 급진적인 조선 병합에 반대했다. 바로 이 강경파로 인해서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 직전 조선 통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온건파의 수장인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이론적으로 일본의 조선 병합을 앞당겼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를 정치·군사적인 측면 이외에 또 다른 관점, 즉 미국의 만주 철도 이권의 측면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1909년 10월 26일 죽음을 맞이했던 곳인 중국 동북지방의 하얼빈을 이토 히로부미가 방문한 시점을 전후해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자.

그날 이토 히로부미는 여러 가지 주요 문제들, 그 중에서도 중국 동북 지방의 중심지였던 만주 지역의 철도 부설권 중 일부를 매입하려는 미국의 관심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코코브쵸프 러시아 재정대신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철도왕 해리먼은 남만주철도 부설권 일부를 매입하는 데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에 해리먼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계속되었다.

사망 당시의 이토 히로부미와 코코브쵸프는 각자의 나라에서 중국 동북 지방의 철도 중 일부를 미국에게 매각하는 것에 찬성하는 ‘만주 철도 중립화’를 주장하는 온건파에 속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으로 인해 아주 조금이나마 철도 부설권을 미국에게 넘기려고 했던 일본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석하고 싶어하는 전략적인 부분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철도 매입을 통해 미국이 만주에 입성했더라면 그 지역에서의 일본의 팽창을 막았을 지의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미국의 존재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일본의 팽창을 견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 동북 지방에서의 일본의 군사 활동이 미국의 철도 부설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미국과의 충돌 위험성으로 인해 최소한 일시적으로 일본의 야욕이 저지되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안중근의 자기 희생적인 행동이 무익하거나 역효과를 냈다는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정치·군사적인 시각에서 보든 철도 부설권의 관점에서 보든 간에 일본의 조선 병합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에 관계없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정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안중근의 일화는 전쟁이 끝나고 오랜 후에도 한국과 중국의 독립투사들에게 희망의 찬가가 되었다. 일본 침략의 암흑기에 안중근의 이름은 피로 물든 중국 벌판에 울려 퍼졌고, 나중에 총리가 된 주은래와 부인 등영초는 전시 연극 무대에서 수도 없이 안중근을 그려냈다.

수십 년이 지나 1982년 필자는 홍콩에서의 유년기 시절 일본 정부가 교과서에서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왜곡한 데 대해 분노한 수많은 대학생들이 안중근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를 벌인 일을 떠올린다. 최근에 와서도 지난 몇 년간 위안부 항의 시위에서 그의 이름이 회자되었으며, 그는 일본의 압제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 국민들 또한 자국 군사 도발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 팽창주의자들 중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에 속하지는 않았다.

위대한 중국의 개혁주의 사상가 양계초는 한때 안중근의 의거에 바치는 송시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양현,” 즉 ‘두 명의 현인’이라고 칭했으며, 이는 한·중·일 3국 모두가 비극적인 싸움의 피해자였다는 점을 분명히 시사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서 안중근의 역할이 한국과 중국의 항일 투쟁에서 매우 숭고하며 영감을 불러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이번 100주년은 증오의 날이 아니라 자기 희생과 화해에 관해 생각해 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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