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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아일랜드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
  •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일본에서는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왜 일어났을까

1918년 신 페인당의 선거 벽보


일본에서는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왜 일어났을까

일제하 최대의 전 민족적 항쟁인 19193·1운동 직후, 식민 본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식민학자 야나이하라 타타오矢內原忠雄사람들은 흔히 조선을 아일랜드에 비유한다. 본국과 가까워서 경제적으로나 국방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 등 조선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지니는 지위를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하여 지니는 지위에 비유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근거하여 아일랜드와 조선의 관계를 설명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 3·1운동 직후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사실상 3·1운동은 일본 군부가 주도한 조선 식민 지배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일제는 무력으로 식민지의 저항을 강제 진압하였으나, 1910년대와 같은 무단통치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 육군은 무단통치 방침을 부분적으로 고쳐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지만 일본 내 번벌 특권 세력의 약화, 정당정치 세력의 성장, 민주주의의 시대사조화, 식민지에서 정우회正友會 세력을 확장하려는 하라 내각原内閣의 움직임, 3·1운동 발발에 대한 육군의 책임론 등과 맞물려 더이상 지배정책으로 관철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어떻게 식민 지배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부 일본 자유주의 지식인, 정당 정치가, 식민정책학자는 조선에서의 자치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서구 제국의 식민 정책에 대한 탐구가 다시 일어나면서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가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일랜드는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저항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영국의 다양한 식민 지배 정책에 대응하여 자치제와 참정권제 등이 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 권력 핵심부, 즉 특권 세력과 군부 세력, 정우회 핵심 세력은 자치제와 참정권제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이런 정책들이 식민지 지배의 안정보다는 일본 제국의 이해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동아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민족운동 문제 1. 동아일보, 1922.1.17

동아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민족운동 문제

1. 동아일보, 1922.1.17


 

식민지 조선에서는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왜 일어났을까

19196월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국제연맹의 전후 세계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패전국뿐 아니라, 전승국의 식민지 지배 체제도 크게 동요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영국의 식민지 지배 체제도 큰 변동을 겪었다. 191812월에 실시된 영국 의회 총선거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한 신 페인Sinn Féin당이 아일랜드 지역에 할당된 의회 의석의 다수를 장악하였고, 영국에 대한 타협적 자치를 주장한 아일랜드민족당은 참패하였다. 신 페인당은 영국 의회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아일랜드 의회를 구성하였고,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194월에는 데 벌레라Eamon De Valera를 대통령으로 하는 독립 내각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조직하여 영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치열한 게릴라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선 민족운동의 기관지를 표방한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 식민지의 민족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이는 단순한 사실 보도가 아니라, 조선 민족운동의 방향과 관련하여 교훈을 얻으려는 탐구의 일환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송진우·김성수 등의 경영진 외에도 이상협 편집국장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기자들, 장덕수 주필을 중심으로 사회혁명당·상해파공산당 국내부 소속의 사회주의 기자와 논설진이 상호 협력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아일랜드의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동아일보는 192049일부터 21일까지 총 13회에 걸쳐 애란 문제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아일랜드의 민족운동 문제를 자세히 고찰하였고, 1920년에서 1923년까지 아일랜드에 대한 기사만 700여 건 이상 보도하였다. 그 외 천도교 계열의 월간지 개벽1920년대 중반까지 상당량의 관련 소식과 논설을 실었고, 동명, 삼천리, 별건곤등에도 아일랜드 소식과 논설이 지속적으로 게재되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민족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의 식민지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아일랜드는 식민지 본국과의 지정학적 관계상 조선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고, 영국에 대한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에 집중적 탐구가 필요했다. 기존의 일부 연구에서 이들이 당시 독립운동에 대신하여 자치운동의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아일랜드와 인도의 민족운동에 주목했다고 보거나, 자치운동의 근거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와 인도의 민족운동을 살펴본 것으로 이해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전도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23년 전반까지 동아일보가 소위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의 입장만을 대변하거나, 자치론자의 주장을 대변한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주장에는 국내 상해파 사회주의자의 입장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의 초기 수용 과정에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신 사상을 수용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족운동의 방향 모색의 현실적 선례로서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탐구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민족운동과 신 페인당의 정책에 대한 동아일보의 이해

동아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민족운동 문제

2. 동아일보, 1922.1.28

 

 

아일랜드 민족운동과 신 페인당의 정책에 대한 동아일보의 이해

영국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전개되던 19203, 영국 자유당은 제4차 아일랜드 자치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아일랜드 민족운동의 역사적, 민족적,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자세히 살피면서, 1차에서 제4차까지의 모든 자치안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영국의 자치안으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가 해결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아일랜드인이 자치에 만족하기에는 영국·아일랜드의 역사가 너무 참담하다는 것, 둘째는 영국과 아일랜드 모두를 결속시킬 민족적 이익이 일치하지 못하다는 것, 셋째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식민지 본국인 영국에서도 노동자 다수와 급진적 정치가들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찬성하므로 아일랜드가 열광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며, 영국의 자치안을 독립사상을 박멸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일소에 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이러한 인식은 아일랜드 민족운동이 진전되면서 변화한다. 신 페인당 주도의 아일랜드공화국과 영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192012월 영국 의회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고, 계엄령 하에서 아일랜드 자치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영국은 자치제를 통해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지배권을 유지시키려 하였다. 신 페인당은 총선거에는 참여하였으나 자치제에의 순응이 아니라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였고, 선거 결과로 성립하도록 되어 있는 자치 의회 구성에는 참여하지 않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사설은 신 페인당이 총선거에 참여한 것이 아일랜드 민족운동에 대한 당의 위력을 과시하고 아일랜드인 다수가 자치에 반대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민족운동 문제 3. 동아일보, 1922.2.4

동아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민족운동 문제

3. 동아일보, 1922.2.4


선거 결과는 신 페인당의 압승이었다. 북아일랜드 지역에서만 영국의 자치에 찬동하는 북아일랜드연합당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다수를 점하는 신 페인당이 자치 의회 구성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영국의 마지막 아일랜드 포섭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 자치제 정책이 좌초되자,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은 크게 선회한다. 19217월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영국 수상은 벌레라 아일랜드공화국 대통령에게 아일랜드 문제 해결에 대한 협상과 조약 체결을 공식 제의하였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협상 중에도 영국군의 군사작전은 계속되었고, 아일랜드의 저항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동아일보는 그 과정을 자세하고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당시의 낙후된 통신 상황과 특파원을 파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언론사의 형편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보도는 이례적이었다.


1921126,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은 내정에서의 완전한 자치권과 육군 설치를 보장하는 선상에서 자치령의 위상을 갖는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에 대해 합의하였다. 동아일보는 192112월 초부터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192217, 아일랜드 의회는 조약을 인준함으로써 아일랜드 자유국을 수립하였다. 신 페인당은 북아일랜드 분리와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 문제 등을 둘러싸고 조약찬성파와 조약반대파로 갈라졌고, 이는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9226월에 시작된 내전은 1923년 중반에 찬성파의 승리로 종료되었으나 결국 신 페인당은 분열되었다. 찬성파는 별도의 정당을 결성하였다.


동아일보는 독립과 자치를 둘러싼 신 페인당 내의 분열과 대립, 내전의 전개 과정, 아일랜드 신헌법의 제정 등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절대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상·민족상·감정상 당연하지만, 입지상·안전상·존립상 조속한 독립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청년의 희생과 국부 탕진, 영국의 반감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아일랜드인의 충분한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려면 실리를 취하는 것이 정치가적 식견이며, ‘실지가實地家적 총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아일랜드 민족운동에 대한 일련의 탐구를 통해 자치에 대한 최초의 부정적 사고가 그 내용에 따라 변화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2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전쟁을 휴전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는 현장 밖에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1921. 7) 출처: 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2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전쟁을 휴전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는 현장 밖에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1921. 7)

출처: 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아일랜드 민족운동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일제는 아일랜드 자유국에 대해 사실상 독립국의 성격을 가졌다고 인식하였다. 그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 식민 정책을 연구한 일제 관학자, 정당정치 세력, 식민 정책 관료,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일본이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아일랜드는 식민 지배 실패의 사례, 반면교사의 대상이었다.

일제하에서 한반도에 정착한 재조일본인이나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는 일본 중의원 선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권리를 위해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으나, 아일랜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일본 본국의 권력 집단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었다. 지방행정제도의 부분적 개선을 통해 제한되고 기형적으로 정치 참여 기회를 늘리는 정책만 논의될 뿐이었다. ‘조선 의회같은 자치제는 일본 본국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참정권은 일제 패망에 이르러서야 전시 악화 및 조선인 징병 등으로 인해 제한적 실시를 계획하였으나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동아일보를 매개로 아일랜드 민족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고 내전이 종식된 후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공화주의·자유주의에 기반한 세력이었고, 그들의 사회개혁정책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나 정책상으로나 조선의 사회주의가 지향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국내 상해파가 분열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급진화되고,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강화된 이후 아일랜드의 민족운동은 단지 참고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 및 천도교 계열 등은 아일랜드 민족운동에 여전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주도한 신 페인당, 영국과 타협하다 몰락한 아일랜드민족당을 면밀히 살폈다. 그들은 합법 공간과 의회 전술의 중요성, 아일랜드 민중을 신 페인당 위주로 결집시킨 과정, 참여 하 투쟁 전술과 대중운동의 배합, 참정권을 부여한 영국 의회에 참여하고 무력화 시킨 과정 등 민족운동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배웠다. 동아일보는 신 페인당 온건파의 노선을 현실주의 노선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아일랜드의 신 페인당을 모델로 삼아 연구했음에도 그 경험을 온전히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신 페인당은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포괄하며 무장 투쟁을 포함한 포괄적 정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해외에서 전개된 무장독립투쟁이나 민족유일당운동 등과 연계를 도모하거나 비합법적 영역을 포괄하는 정치적 결사의 조직 운동으로 발전하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민족운동에 광범한 대중을 결집하려면 대중적이고 합법적 운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 전투적 담보가 바탕이 되어야 합법적 대중정치운동이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고, 타협과 개량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동아일보나 천도교 계열뿐 만이 아니라, 국내 민족주의 세력 전반에 부여된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