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이츠의 초상(1920)
20세기 주요 영미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는 50여 년에 걸쳐 열정적으로 시를 쓰고 문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시 창작은 아일랜드의 독립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정치・역사적 시대상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이룬 1916년 부활절 봉기에 대한 시인 예이츠의 민족주의 견해를 주요 시 작품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부활절 투쟁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는 12세기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 때부터 시작되어 거의 700년에 이른다. 아일랜드가 1801년 영국에 합병되면서 그래탄Grattan 의회를 해산하고 1922년 아일랜드자유국가Irish Free State를 거쳐 1948년에 아일랜드공화국Republic of Ireland으로 온전히 독립하기까지 영국과 아일랜드의 적대관계는 계속되었다.
영국의 경제적 수탈, 불공정 수출입 규제 등 경제적 종속으로 아일랜드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고, 종교적 측면에서도 양국의 분쟁과 갈등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이 고조되면서 독립(자치)을 위한 움직임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자치권의 시행은 종전 이후로 연기되었고, 아일랜드공화주의형제단은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 봉기를 일으키기로 한다.
결국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1천여 명의 독립군이 더블린중앙우체국을 비롯하여 주요 시설을 습격하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독립군은 기습 작전으로 전략 요충지를 점령하고 중앙우체국을 임시정부로 삼아 아일랜드 국기를 내걸었다. 봉기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Patrick H. Pearse는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에 영국군은 진압을 위해 대규모 전력을 갖추고 더블린을 침공했다. 독립군은 일주일간 지속된 격렬한 전투에서 항쟁하였으나 영국의 함포사격과 무력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봉기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잔인하고 혹독했다.

912년에 발간된 예이츠의 시집
출처: National Library NZ on The Commons
예이츠의 시 세계
영국군의 무차별 사격이 일어나고 무고한 희생이 뒤따르자 아일랜드인들은 분노하였다. 특히 가톨릭 주교의 봉기 세력 지지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1918년 신 페인은 독자적으로 개최한 아일랜드 의회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아무도 아일랜드의 결연한 독립 의지를 막지 못했다. 결국, 아일랜드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1922년 아일랜드공화국을 수립했다.
예이츠는 그의 시 「1916년 부활절Easter 1916」에서 ‘끔찍한 아름다움이 태어났다’라고 부활절 봉기를 서술한다. 아름다움을 끔찍함으로 여기는 역설은 봉기에서 싸운 이들에 대한 존경과 분리의 감정을 전달한다. 이는 그들이 죽어서 묻혀 있더라도 미래의 혁명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감을 주면서 영원히 살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노래한 끔찍한 아름다움은 혁명가들이다. 부활절 주간에 아일랜드가 부활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세이머스 딘Seamus Deane은 그의 논문 ‘예이츠와 혁명 사상’에서 무장독립투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16년 아일랜드인들은 역사 앞에 죽음을 바쳤다. 그들은 고질적인 반복의 순환을 깨부수었고, 그들의 의식은 민족의식이 되었다. 결국 아일랜드의 특수성과 토대는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죽음을 통해 중재되었다.”
「장미나무The Rose Tree」는 부활절 봉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또 한 편의 시이다. 이 시는 패트릭 피어스Patrick Pearse와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가 정치 분쟁으로 말라가는 장미나무에 대해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당시 영국의 물질주의와 영국풍 생활방식을 동경한 아일랜드인에게서 정체성이 소멸되어 가자 그는 아일랜드가 시들어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든 장미에 잎이 돋아나고 다시 꽃을 피우려면 물이 필요한데 ‘모든 우물이 말라 버렸으니’, ‘어디서 물을 끌어오지?’라고 화자가 먼저 말을 건넨다. 그러면 청자는 지도자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우리의 붉은 피’만이 ‘의로운 장미나무 한 그루를 키울 수 있다’고 답한다. 예이츠는 “피어스나 코널리가 승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본다. 피어스가 말했듯이 그들은 세대마다 피가 뿌려지지 않는다면 민족주의운동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죽으러 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봉기에 관련된 또 다른 시 「오레일리가의 수장 오레일리」에서 예이츠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운동 지도자 오레일리를 언급한다. “케리 주에 사는 모든 이들이 / 그 미친 싸움에 끼지 않도록 / 자기 돈을 들이며 애를 썼다”. 봉기를 계획한 피어스와 코널리 등은 의도적으로 오레일리에게 봉기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봉기 기간인 1916년 4월 28일에 지휘소인 더블린중앙우체국에 불이 붙자 탈출로를 찾아 자원해 나섰다가 영국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는다. 응급구조대가 그를 구조하려 하였으나 영국군 장교가 막아서서 오레일리가 죽도록 내버려 둔다.
예이츠의 시대정신
예이츠는 봉기 주동자들의 순교가 아일랜드 민족주의운동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으로 생각한다. 예이츠는 애국지사의 희생에 대해 “애국심이 순교에 의해 유발되었다면 논리적인 토론은 소용이 없다”(Jeffares 1962: 188)라고 말한다. 봉기 이전에는 영국과의 거래나 양보를 통해 독립을 찾자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논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봉기 이후, 영웅들의 죽음 이후에는 더이상 영국과의 타협과 거래 혹은 주고받기에 의한 아일랜드 독립의 모색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함이 배여 있다.
예이츠에게 정치는 주요 관심사이며 아일랜드는 그의 예술의 중심이다. 그의 시와 아일랜드의 현실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정치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시에 반영되었다. 예이츠 자신도 정치적 관심이 그의 시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엘리엇T. S. Eliot은 예이츠를 “한 개인의 역사가 곧 자기 시대의 역사가 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예이츠가 평생 예술과 삶을 대하고 풀어가는 자세에 있어 개인적 차원의 일과 국가적 차원의 일을 함께 엮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