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기양 중국역사지도집(1982)에 표시된 연장성

요령성연진한장성자원조사보고(2017)에 표시된 요동 지역의 연장성
문헌 기록 속의 연장성
중국 동북 지역을 주 세력 범위로 하던 고조선의 남서쪽에는, 중국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나라가 있었다. 두 국가는 서로 밀접하게 교류했다. 고고학적으로는 늦어도 기원전 5세기부터 교류가 확인되지만, 문헌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양 국가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위략魏略』에는 “주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제후국이었던 연나라가 스스로를 ‘왕’으로 부르고 동쪽을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고조선이 연나라와 견줄 수 있는 정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후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리를 빼앗았다.”고 한다. 한편, 『사기史記』 「흉노열전」 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습격하고,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책 「조선열전」에는 “연나라가 번성한 후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장새障塞를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 지역에는 연나라가 동호 및 고조선을 습격하여 확보한 영역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성이 존재한다. 연나라는 다른 중원 제후국인 조나라, 제나라, 진나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남쪽에도 장성을 쌓았다. 이 둘을 구분하여 전자는 연북장성燕北長城이라 부르고, 후자는 연남장성燕南長城이라 부른다.


요서 지역에 남아있는 연장성의 모습과 성벽 단면
연장성의 진행 방향과 구조
연장성은 기본적으로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지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흙을 채취하기 용이한 지역의 경우 흙을 일정한 두께로 다져서 쌓아 올렸고, 산등성이나 암반에 위치하여 흙을 채취하기 어려운 지역의 경우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장성 부근에는 군대의 주둔이나 지휘를 위해 축조한 방형 혹은 장방형의 작은 성지障城 또는 연락이나 감시를 위한 봉수대烽燧臺가 배치되었다. 흔히 ‘장성’이라 하면 만리장성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성벽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나마 잘 보존된 요서 지역의 연장성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상당 부분 훼손되어 성벽의 기초부 정도만 남아 있는 정도이다.

2012년 연장성으로 보도된 법고 지역의 석축(石築)
변화하는 요동 지역의 장성선(長城線)
그런데 요서 지역과 달리 요동 지역의 장성은 그 실체가 모호하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요서 지역에서부터 연결된 장성이 요동 지역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요동 지역에서는 장성이라고 여길 만한 성벽이 확인되지 않는다. 가령 1982년에 발간된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장성이 요양遼陽의 북쪽인 무순撫順을 통과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1995년에 발표된 논문 「연북장성고燕北長城考」에는 길림성 사평 이룡호고성의 북쪽으로 지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 부여조에 나온 “부여가 장성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을 중시하여, 부여가 장춘에 있었으므로 그보다 아래에 있던 이룡호고성의 북쪽 어딘가로 장성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물론, 장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한편, 2017년에 발간된 『요령성연진한장성자원조사보고遼寧省燕秦漢長城資源調査報告』에는 이보다 더 남쪽을 지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중국에서는 연나라가 축조한 성벽으로 발표했다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 축조된 성벽을 연나라가 축조했다고 하기도 하는 등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인다. 2012년 6월 요심만보遼沈晩報에는 요령성 법고에서 연나라 장성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기사의 사진을 보면 실제로 돌담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발견은 이후의 다른 연구 논문이나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와 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1986년에 발간된 『요령고장성遼寧古長城』 보고서에는 본계와 관전 지역에서 명나라 때 축성된 석축 성벽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요령성연진한장성자원조사보고』는 이들을 연나라가 축조한 장성으로 보고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아마 연나라가 축조한 장성을 명나라가 재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둘을 연결시킬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1986년 명대(明代) 장성으로 보고된 본계 지역의 장성
연장성은 정말 요동지역에 있었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동 지역의 연장성은 명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연나라 화폐가 매납된 유구나 연진燕秦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는 유물산포지의 존재를 장성의 존재 가능성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사실 이러한 매납유구와 유물산포지는 장성선 이외의 지역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따라서 이들을 장성과 연결시킬 경우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장성선 또는 장성 분포지가 존재하게 된다. 즉, 매납유구나 유물산포지는 장성과 관계없이 이 지역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화폐 매납유구는 연나라 등 중원 세력과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 집단의 교역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