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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가다
부여의 심장부 ‘길림’ 땅이 비옥하고 오곡이 나다
  • 이종수,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용담산에서 바라본 부여 도성 일대와 길림시 전경



길림吉林의 명칭은 강가의 마을을 의미하는 만주어 기린우라吉林烏拉에서 유래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중심지였고, 부여 시기에는 왕성이 있었으며,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는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청나라에 들어 처음으로 길림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1954년 길림성 인민정부가 장춘長春으로 이전하기까지 성도省都 역할을 담당했던, 말 그대로 유구한 역사가 깃든 땅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땅

필자가 유학 시절 처음 찾아간 길림은 아늑하면서도 온화한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 황량한 벌판만 넓게 펼쳐진 장춘시와는 사뭇 달랐다. 강을 사이에 두고 넓게 형성된 충적 대지와 낮은 구릉이 길게 이어진 풍경은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에 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산과 언덕과 넓은 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으며, 오곡이 자라기 적당한 토질을 갖추었다고 한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은 정확했다. 훗날 사비로 수도를 옮긴 백제가 나라 이름을 왜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는지 이해가 됐다.

    



부여 금동가면

1 국립중앙박물관 2 길림성박물원 3 요령성박물관(라마동 고분군 출토품)



부여의 얼굴 금동가면, 신기영악(神氣獰惡)

길림은 부여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대표 유적으로는 포자연전산유적泡子沿前山遺蹟, 동단산유적東團山遺蹟, 모아산고분군帽兒山古墳群, 용담산산성龍潭山山城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세기 초 일본이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시작됐다. 하마다 고사쿠滨田耕作, 야기 쇼사부로八木槳三郎,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 후지타 료사쿠滕田亮策 등의 일본인 학자와 이문신李文信과 같은 중국인 학자가 모아산, 서단산, 용담산 등을 조사했다. 당시의 조사 성과는 만주사적满洲史迹, 만주구적지满洲舊迹志, 만주고고학满洲考古學등의 학술지에 실려 있다.


부여 유적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도굴과 국토 건설 등으로 인해 파괴되고 훼손됐다. 그럼에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최고는 금동가면이다. 금동가면은 동단산과 모아산 부근에서 수십 점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길림성박물원 1, 여순박물관 1, 국립중앙박물관 2점 등 모두 네 점만 남아 있다. 금동가면의 생김새는 이 가면을 처음 발견한 이문신이 신기영악神氣獰惡하다고 표현할 만큼 무섭고 괴이하다. 얼굴은 길고 갸름한 형태에 머리카락을 꼬아 올려 상투를 틀었고, 이마에는 세 줄의 굵은 주름이 표현되어 있으며, 날카롭게 올라간 눈과 볼록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벌어진 입에 오목하게 강조된 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모습이 과연 부여인의 얼굴일까? 아쉽게도 부여인의 얼굴을 복원한 예가 없어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이러한 얼굴형은 부여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기원전 6~5세기 고조선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는 요양박물관 소장 탑만촌塔灣村 출토 청동도끼 거푸집 인면상에서도 땋아 올린 머리카락, 약간 치켜뜬 눈매, 볼록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등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전체적인 얼굴형이 부여 금동가면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고구려 집안 임강묘臨江墓에서 출토한 차할車轄의 얼굴 모양도 부여 금동가면과 일치하고, 전연前燕시기 부여 후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라마동喇嘛洞 고분군 출토 금동가면 얼굴의 형태도 부여 금동가면과 유사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부여 금동가면의 형태는 당시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일반적인 예맥계 민족의 얼굴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며, 신기영악한 모습은 아마도 제작 과정에서 약간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면은 어디에 사용되었던 것일까? 필자 역시 그 용도가 궁금하여 강연과 발표에서 청중에게 질문해 보았다. 제사 등의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죽은 이의 얼굴에 씌운 복면이라는 견해, 축제의 가무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면의 상투 끝과 턱 밑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고, 양쪽 귓불에도 비슷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들은 가면을 쓰기 위해 끈을 묶는 용도로 사용했거나 혹은 어떤 물체에 부착하기 위해 만든 못 구멍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면 안쪽 눈 사이에 세로로 구멍이 뚫린 고리가 부착되어 있어 안쪽에서 고정이 가능토록 하였다. 또한, 코 주변과 눈 사이가 사용흔으로 인해 반질반질하게 광이 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이 가면이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금동가면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길흉을 점치는 행위에 사용된 후, 제사 관련 유구 혹은 왕과 귀족의 무덤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