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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 임상선, 재단 명예연구위원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의 제목의 책 이미지


발해사와 유득공

한국과 중국의 발해사 다툼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발해사가 중국사인지 한국사인지에 따라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 귀속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재단 뉴스레터 20201월호 발해사는 동아시아에서 어떤 의미일까참조) 한국 측 발해사 인식의 핵심적 논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가 우리 역사에서 남북국을 이룬다고 한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저술 발해고에 있다. 유득공은 청, 몽골, 회회,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의 국가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유득공의 역사 외교 활동

본서는 유득공의 연행 과정에서의 활동이 오늘날 역사 외교관의 임무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서술한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여 청을 방문한 외교사절의 일원으로서의 활동은 유득공의 일생에서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정조 치세 기간인 1778년 심양瀋陽 방문, 1790년 열하熱河를 거쳐 연경燕京을 다녀왔고, 1801년에 정조의 죽음 직후, 다시 연경을 다녀왔다. 세 번의 청나라 방문은 약 12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고, 유득공의 역사와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도 깊어졌다. 그 중 유득공이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새로운 길로 열하에 갔다며 애착을 가졌던 1790년 청 고종(건륭제)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의 구성으로부터 출발, 활동, 귀국 보고에 이르는 과정을 중심으로 유득공이 한 역할을 검토하였다.


유득공은 남의 신하는 외교를 할 수 없다(人臣無外交)’는 전근대 한중관계에서 타국의 형편을 살피는 것이 사신의 직분이라고 보았다. 사신단은 연행 과정에서 청나라 이외에도 동남아시아와 서양 여러 사절을 만나,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는 기록으로 정리하여 수시로 한양에 보고했다. 유득공은 청나라의 주체 민족인 만주족을 비롯하여 한족漢族, 몽골, 회회回回,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서구 열강,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대만 등의 민족과 국제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습득한 지식을 기록했다. 오늘날 역사 전문 외교관 모습과 다르지 않다.


유득공은 사신의 직분인 타국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회회·몽고 만주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어漢語도 배우려 하지 않고, 심지어 무식한 자는 한어를 오랑캐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유득공은 오랑캐 말을 배우는 것이 또한 어찌 쓰일 때가 없겠는가 라며 개탄해 했다. 말은 타국의 형편을 듣기 위한 것이고, 글자는 타국의 형편을 잘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790년 연행사 여정도

정조 14년(1790) 5월 27일 출발로부터 10월 22일 귀국 후 복명까지의 왕복 일정



정조와 실학자들의 국제 관계 인식 차이

조선의 사절단은 청나라로의 출발에서 귀국에 이르는 주요 지점이나 행사가 있으면 수시로 한양에 보고했다. 오늘날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임금은 사신단의 사전 보고를 받고 거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정조는 외국에 다녀 온 사신단으로부터 3회에 걸쳐 귀국 보고를 받았다. 첫 번째는 정사와 부사로부터, 두 번째는 서장관으로부터, 세 번째는 수석 역관으로부터 각기 다른 날짜에 사행 활동 전반에 대하여 보고받았다. 3회의 보고를 통하여 사신단이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확인하고, 누락되거나 거짓 보고하는지를 교차, 점검했다.


19세기 후반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도 조선의 구성원들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책봉 관계를 부득이하게 받아들였지만 심정적으로는 오랑캐라는 기존의 멸시적 관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미래 인식에서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청의 발달한 문물과 사상을 본받고, 국제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조와 주류 집단은 58백여년 전 과거 송나라의 정치와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운명을 청조에 맡기며 외교를 포기했다.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

중국 북경 古宮博物院 소장. 만국내조도는 청 건륭제 시기 주변의 조선, 

일본, 안남을 비롯해 유럽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에서 내조한 사절단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유득공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

경기도 남양南陽의 섬사람 아낙이 엿이 단 줄만 알다가 처음 꿀을 먹어 보고 단맛이 세상에 비길 데가 없다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유득공은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세상에 엿이 있는 줄만 알 뿐 꿀이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또한 많다고 생각했다. 청나라 만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다가오는 서양을 정확하게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득공은 세상만사는 지나간 일을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있으니 역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세상이 태평하고 고요하더라도 국제관계에 관심을 갖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유득공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들이 여전히 귀기울여야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