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협정문에 서명하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
문산, 1953. 7. 27. 오후 1시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당일 오후 10시를 기해 전투가 중지되었다.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 사령관은 그날 오후 2시에 유엔군 장병에 휴전 메시지를 발표했고,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미8군 사령관은 9개 국어 방송으로 오후 10시에 휴전 명령을 내렸다.
평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정전협정
조인식을 마친 클라크 사령관은 “한국전쟁 상태는 관계 국가들이 정치적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조인 성명을 발표하면서, 통일 목표는 기어코 성취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미 대통령은 “한국 휴전은 세계의 감정과 정치 정세로 보아 거의 해결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로이드 영국 외무상은 하원 연설에서 “한국 휴전은 한국민의 안녕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총회 의장 피어슨Lester B. Pearson은 “협정 조인은 유혈과 충돌의 종결이라는 한 장의 끝을 뜻하지만, 평화 수호라는 어려운 새 장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언급은 전쟁과 휴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담고 있는데, 요점은 휴전이 필요하고 현재로서는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평화 수호라는 정치적 해결이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일단 정지시켰지만,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남겼다. ‘종전’이 아닌 ‘정전’이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정해진 수순이 아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지닌 70년 가까운 시기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남과 북, 혹은 북과 미국 간 협정의 주체 문제, 외국군 철수 문제 등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한 대립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궁극적 지향점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지만, 그 내용과 실현 방법에 대한 이견도 여전하다. 이 대립의 출발은 휴전회담에서 비롯되었고, 정전협정 체결 직후의 정치회담에서 원형이 형성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고 온전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평화’의 관점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사람이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사람이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정전협정의 주요 내용
1953년 7월 27일 합의한 6·25전쟁 정전협정문은 서문, 전문 제5조 제63항, 부록 제11조 제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협정의 체결 목적, 성격, 적용 범위를 언급하며, 전문 제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제2조는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 제3조는 전쟁 포로에 관한 조치, 제4조는 쌍방 관계 정부들에 대한 건의, 제5조는 부칙사항이다. 부록은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 범위에 관한 규정이다. 그 가운데 전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제4조 60항이다.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
어쩌면 이 조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미의 ‘건의한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양측이 합의한 것은 ‘건의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쉽게 합의했지만, 그만큼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
휴전회담의 쟁점: 어디까지가 정치 문제인가
휴전회담은 전쟁을 군사적으로 종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전후 준비 과정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의제 선정부터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양측은 의제별로 전쟁의 전개 과정, 관련 각국의 협상 정책, 한국의 휴전 반대 요인과 맞물려 복잡한 협상 과정을 거쳐 타협점을 찾아 나갔다. 미국은 회담 의제를 선정하는 데 있어 군사적 정전 및 그 결과로서의 휴전과, 이 휴전이 적대 행위 재발을 방지하는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기본 전제로 출발했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군사적 휴전을 넘어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까지도 다루기를 원했다.
휴전회담을 시작할 때 양측은 순수하게 군사적 문제에 국한하여 회담하기로 합의했지만, 어디까지가 군사적 문제인가에 관한 판단은 서로 달랐다. 양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것과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두고 의제 선정 과정에서부터 충돌했다. 특히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두고 공산군 측은 ‘이것이 군사 문제’라고 주장하며 의제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정치 문제’라고 판단했다.
회담 결과, 협정문에 담긴 조항은 그 의제에 대해 양측이 합의한 것들이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군사력 증강 금지, 중립국 감시 기구 구성이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라면, 정치회담 관련 조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항구적인 해결을 지향했다. 협정문의 앞 두 개 조는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지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반면, 정치회담 관련 조항은 ‘군사정전협정’의 불완전함을 넘어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지향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출처: 국가기록원)
제네바 정치회담: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 통일 방안
휴전 직후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 따라 정치회담 개최를 위한 판문점 예비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이렇게 실무자급 예비회담이 결렬된 후 양측은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54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영·불·소 4개국 외상 회의에서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자.”고 결정했다. 4개국 외상은 공동성명에서 “이 회의는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독립된 한국을 수립하는 것이 국제 긴장 완화와 아시아 다른 지역에서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고려하고,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곧 ‘통일 독립된 한국’을 수립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는 주로 한반도 통일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 때문에 제네바 정치회담은 전후 정전체제의 출발점이자 한반도 통일 방안을 공식적으로 다룬, 처음이자 마지막 국제회의로 평가된다.
1954년 4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에는 한국과 유엔 참전 15개국(참전국 중 남아공은 불참), 북한·중국·소련 등 총 19개국이 참가했다. 통일 방안이 핵심 의제로 다루어졌고, 논의 과정에서 외국군 철군 문제와 유엔의 권위 인정 여부가 쟁점으로 부각됐다. 여기서 양측은 모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중국군이 먼저 철수하고,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이 인구 비례에 의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국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반면, 공산군 측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한 뒤 남북 대표가 동수로 참여하는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거법을 마련하고, 중립국 감시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렇듯 양측은 선거 방법과 선거 감시 문제에서 차이를 보였고, 특히 외국군 철수 문제에서 차이가 있었다. 유엔군 측은 침략군인 중국군의 우선 철수를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중국군과 유엔군 등 모든 외국 군대의 즉각적인 동시 철수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엔군 철수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각자 정치회담에 임하는 자세는 입장 차이가 있었다. 특히 공산군 측이 유엔의 역할과 지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유엔의 권위 인정 여부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공산군 측이 유엔에 대해 갖는 이러한 인식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미국은 유엔의 권위 문제가 본격적으로 쟁점화되는 시점에 논의를 중단시켰다. 결국, 한국 문제는 유엔총회로 넘어가고 정치회담은 일방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치회담과 군사 동맹
정치회담은 휴전회담의 연장선에서 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타협이나 협상의 여지는 더 적었다. 휴전회담에서는 전투를 끝내고 휴전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타협하고 합의해야 했지만, 정치회담은 그러한 강제 요소가 없기 때문에 참가 주체들의 의지와 해결 노력이 한층 더 필요했다. 그러나 정치회담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실질적 타협점을 찾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전장’이었다. 또한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정착시키는 정치·외교적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미국은 정치회담을 통해 외국군 철수 문제에 정치·외교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한미 동맹 구조를 만들어 주한미군 주둔을 현실화했다. 이는 정전 직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공산군 측이 정치회담 의제로 설정한 외국군 철수 문제는 이미 진행 중인 전후 동맹 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은 전시에 휴전회담장과 국제무대에서 ‘유엔군을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에 대한 논쟁 자체를 피했다. 전후 정치회담에서도 미국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고, 한국은 침략군인 중국군의 철수만을 요구했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후 한반도에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분단체제가 고착화 되었다. 이 과정은 예견된 것이었다. 회담에 참여한 어느 편도 평화적 방법으로 분단이 해소될 것으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회담의 개최 목적인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 통일을 지향하기보다는, 분단 구조의 ‘평화로운 관리’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전체제와 분단 구조
한반도 정전체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의 결과이다. 단지 38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바뀐 채 남북 분단 구조를 유지하는 틀로 작동할 뿐이다. 전투는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중단되었지만, 평화 보장 조치는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 정전협정문은 ‘군사정전협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순수하게 군사적 문제만 다루고, 온전한 평화로 가기 위한 정치적 해결을 과제로 남겼다. 정전 이후 70년 가까이 그 과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과 평화의 전환점에서 ‘정전’이라는 유예 기간이 필요했지만, 이토록 오래 정전 상태가 지속된 전례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전쟁 당사자임에도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전이 성립되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위임을 받은 유엔군사령부가 정전협정의 이행을 관장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이 낳은 결과이며, 유엔을 통한 집단안보체제의 한계와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세계적인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가 여전히 냉전 구도에 매여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언제쯤 우리는 ‘냉전의 박물관’에서 벗어나 ‘평화의 전시장’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