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실장,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및 독일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중국 지린대 해외석좌교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을 역임했다.
연구 주제는 한국 정치, 정치·헌법 이론, 동아시아 국제관계, 평화 문제이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Ⅰ·Ⅱ, ‘한국 1950:전쟁과 평화],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인간국가의 조건’ Ⅰ·Ⅱ(근간), ‘세계 시민전쟁의 절정](근간) 등이 있다.
한국전쟁은 지난 70년간 우리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해왔다. 우리 정부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겪게 한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한 바 있다. 동 위원회는 국내외에서 각종 사업을 활발히 추진한 뒤 올 6월을 계기로 1년 6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였다. 이에 동 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는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를 만나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들을 되짚고, 동북아 평화를 위한 화해의 해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인터뷰 | 최운도, 재단 교류홍보실 실장

교수님께서 활동하신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를 간략히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위원회 차원에서 많은 활동과 사업을 진행하였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국내외 참전 용사와 국민이 함께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국무총리와 민간인 각 1인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활동 기간은 지난해 1월부터 올 6월 말까지였고요. 출범과 동시에 급작스레 닥친 세계적인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국내외에서 다양하고 활발하게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1년 6개월간 추진한 모든 행사와 기획이 의미 있고 감동적이었지만, 저로서는 지난해 6월 25일 성남공항에서의 147구의 유해 봉환 및 참전국을 대상으로 마스크 300만 장을 지원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자는 조국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은 단 한 영혼도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고 책임진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후자는 한국민들이 세계로부터 받은 도움과 헌신을 끝까지 잊지 않고 보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눈시울이 뜨겁고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이번 활동에 대해 개인적인 소회가 크셨던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지원받은 나라의 지도자들과 참전 용사들이 보내준 가슴 뭉클한 감사 인사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 지구적인 대 위기 상황에서 마스크를 주는 행위도, 진심 어린 감사의 말들도, 모두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인류애와 인간애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엮는 마음의 끈 중에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서로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입니다. 오래전 전쟁 현장을 답사할 때 끝없는 죽음들을 목도하며 몸으로 깨달았던 것을,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에서 한국인과 세계인이 보여준 행동과 마음을 통해 다시 확인했습니다. 저에게는 영혼의 전도顚倒와 같았습니다.
또한,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위상에 새삼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30주년을 지나 40주년, 50주년, 60주년을 지켜보며 70주년의 의미가 남달랐던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한국 시민이자 세계 시민으로서 겸손하지만 당당한 자부自負라고나 할까요? 개인이나 나라가 어렵던 시절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는 것만큼 자랑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요.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은혜를 갚고 싶어 하지만, 도덕적인 마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갖추거나 행위로 옮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공동체의 지난 70년은 정말 특별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이 갖는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발전의 가장 대표적인 축도縮圖라고 생각합니다. 종전 시점의 한국은 절대 폐허였고 문자 그대로 ‘완전한 잿더미’로, 저는 예술과 역사의 은유를 빌어 역사적 ‘0零년’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1953년 당시 한국의 비극적 참상은 ‘0년’으로 불러도 될 만큼 철저하고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현재의 한국은 G7에 초대받는 경제 선진국인 동시에 무역 대국·첨단 기술 국가이자,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국가입니다. 이를 이루어낸 여정은 마치 흑암에서 창세를, 어둠에서 빛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적의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발전이 없었다면 6·25전쟁 70주년을 기하여 이루어진, 이토록 다양하고 체계적인 국제 보훈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식민 점령과 전쟁을 경험한 나라가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경우는 우리나라 말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는지, 그리고 전쟁 발발 당시의 국제 정세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전쟁은 규모와 영향, 그리고 성격상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세계전쟁이었습니다. 병력, 의료, 물자 지원국을 포함하여 참전국 수만 보아도 제1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모든 대륙이 참전한 전쟁이었고, 이는 당시 국가 중 70%가 넘는 숫자였습니다. 물론 한국으로의 참전이 북한으로의 참전보다 7~8배 더 많았습니다. 전 세계의 마을, 공장, 거리가 한국전쟁으로 들끓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비나 관련 시설 등이 미국의 케이프 캇Cape Cod, 태평양과 인도양,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Belfast 등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을 만큼 이 전쟁은 가장 특이한 세계전쟁이었습니다. 개별 국가 전쟁으로서 이러한 사례는 단연 한국전쟁이 유일합니다.
당시 자유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자유와 평화를 세계 및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했고, 공산 진영의 사람들은 혁명과 이념을 세계 및 자신들의 그것과 일치시킬 만큼 서로 뭉쳐있었습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정점으로 한, 인류 역사상 첫 번째의 대 이념전쟁이라는 점도 크게 작동했을 것입니다. 콜롬비아, 필리핀, 터키, 미국, 영국, 호주, 에티오피아의 조용한 마을은 머나먼 나라,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슬픈 청년들의 사연을 갖게 되었고, 동유럽 국가들의 공장과 가정에서는 북한으로 물자 보내기 운동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김일성과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정교하게 왜곡한 ‘미국과 남한으로부터의 북침’이라는 허위 주장과 선전으로 인해서, 유럽의 동독과 아시아의 중국에는 ‘(미국의) 다음 공격 차례는 우리’라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이는 스탈린의 공산 세계 장악을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물론 스탈린은 북침으로 위장한 이 전쟁을 허락할 때부터 한국전쟁을 활용해서 자신의 공산 세계 장악과 지배를 미리 의식하고 구상할 만큼 매우 치밀하고 전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선제 군사 공격은, 자유 세계로 하여금 유엔과 미국을 중심으로 사상 최초의 유엔군을 결성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참전을 통해 집단 안보와 단결을 실현하게 했으니 철저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전쟁은 유럽의 나치즘·파시즘과 아시아 군국주의의 패퇴 이후 처음으로 맞붙은 자유 세계와 공산 세계의 대결에서 두 진영의 편대를 정렬시켰습니다. 세계는 이 열전 이후 비로소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자체가 지닌 성격과 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영향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백만에 달하는 참혹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비극도 이런 대비극이 없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세계는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서 전쟁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생명과 평화에 대한 의지를 굳게 다졌습니다. 한국이 빛의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전쟁의 참상을 견뎌낸 체험으로 인해 고난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단단한 집합 의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렵다 한들 6·25 난리, 6·25 전쟁보다야 더 하겠냐”는 철鐵의 의지가 형성된 것이지요. 모두의 가슴에 박힌 마음 다짐의 굳은살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이 전쟁은 세계 질서를 정초定礎한 세계형성전쟁world-formative war이었습니다. 이로써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정점으로 하는 ‘자유’와 ‘공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적 대결 구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 전쟁으로 국제관계도 급변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적국으로 전환했고,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동맹으로 전변轉變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우리가 정전체제라고 부르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전후체제=전후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오늘의 내부와 외선의 근간을 설정한 것도, 한국이 한미 동맹을 통해 중국-일본-소련(러시아)의 전통적 안보와 영토 위협에서 벗어난 것도 이 전쟁으로 인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즉, 한국전쟁은 한국과 북한 모두에게 가장 결정적인 국가형성전쟁state-making war이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이 전쟁의 성격은 한마디로 세계시민전쟁, 세계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한국인은 한국인들대로, 또 세계는 세계대로 어떤 이념과 체제가 더 시민적인지, 더 자유롭고, 더 문명적이고, 더 우월한지를 격렬히 다툰 전쟁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한국인들은 모두가 세계 시민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국제전도 아니고 내전도 아닌, 전형적인 세계시민전쟁이자 세계내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서 한국전쟁이 오늘날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국전쟁에 학문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오늘의 한반도는 북한의 선제 군사 행위로 인해 정전체제와 북핵체제라는 두 개의 안보 레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제의 핵심을 잘 간취하게 해주었다고 봅니다. 이 두 개의 체제를 넘는다면 한반도는 다시 장기 평화로 돌입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반도는 단기적인 전란의 시기를 넘을 경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장기 평화를 향유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에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저는 정부와 민간을 통틀어 종전 이후 처음으로 정전 협정을 대체하는 한반도평화협정 초안을 제출했습니다. 그 이후 서울, 평양, 워싱턴, 베이징, 베를린에서 발표와 토론을 가지며 그것을 계속 다듬어온 것은, 전후체제 극복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전쟁 세대의 감당할 수 없는 비극과 고통을 지켜본 세대로서 후대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물려주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한국전쟁을 공부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래로 나아가려면 전쟁의 기원보다 종결을 기억하고, 전쟁의 과거보다 평화의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혹시 한국전쟁 70주년을 계기로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으신지요?
워싱턴 홀로코스트박물관 옆이나 뉴욕 유엔본부 부근에 한국전쟁기념박물관Korean War Memorial Museum을 세우고 싶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 가장 많은 국가가 참전한, 냉전 시대의 세계를 대표하는 세계전쟁이자 세계열전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바로 그 냉전시대의 세계전쟁냉을 극복한 가장 성공적인 나라입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전쟁의 비극과 참상, 당시 세계인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연대, 그들의 헌신과 희생, 전후 인간들의 가능성과 비약을 보여주는 인류 역사의 한 전형으로서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그동안 제주4·3사건이나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상을 절실하게 희구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루어지는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전쟁 40주년에 처음 제기한 ‘한국전쟁 참전수당 지급’ 주장이 실례입니다. 한국전쟁의 근본 성격이나 세계인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 우리의 국력과 후대의 지혜와 역량에 비추어 볼 때 ‘한국전쟁기념박물관’도 건립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곳은 전쟁 방지와 평화 의지를 다지는 명소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전쟁 50주년에 워싱턴 홀로코스트박물관 앞에서 가졌던 꿈인데, 이제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앞두고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첫걸음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