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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15년 역사와 함께 한 고구려 연구
기고 재단 15년 역사와 함께 한 고구려 연구 2003년 7월 국내 한 언론에 중국변강연구사지연구중심과 동북 3성이 함께 ‘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을 2002년부터 진행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고구려사이고, 기본 논지는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학계와 정부, 일반 국민 모두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공작을 성토하였다. 그러면서 그간 소외학문에 속했던 고구려 연구자 현황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렸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고구려 연구자가 14명이라는 사실을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고구려 전공 박사는 그 숫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2003년 12월 9일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중국에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 주장하며 근거로 제시한 내용들을 반박하는 학술대회였다. 필자는 그중 한 주제인 고구려 유민 연구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93년 8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제1회 고구려국제문화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집안시가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말이나 자전거가 끄는 빵차가 공식 택시였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으며 압록강 건너편이 바로 만포시여서 출퇴근하는 북한 주민이 다 보였다. 남한과 북한, 연변대학 조선족 학자,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학자, 일본과 대만학자가 참여한 국제학술회의였다. 그때 껑톄화, 쑨진지 등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며, 문화 역시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발표를 했고, 그에 대해 남북한 학자들이 크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동북공정의 시작에 영향을 준 사건 중 하나였다. 이 두 건의 학술회의는 필자의 이후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김현숙,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의 15년
연표 동북아역사재단의 15년 주변 국가들이 한국사의 정체성을 흔들고 영토주권이 도전받는 상황이 전개되자 한·일, 한·중 사이에 발생한 제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전담 기구 설립이 시급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적 관심과 요청을 수용하여, 대통령은 2005년 3월 역사 왜곡 문제에 중장기적으로 대응할 상설 전담 기구 설립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2006년 9월 22일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역사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학술 연구와 정책 개발, 역사 현안 해결을 위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재단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 규명을 통하여 균형 잡힌 역사관 정립과 역사 담론 창출을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일본의 독도 도발이 확대되는 가운데 2007년 8월 15일 사이버독도역사관을 개설하고, 이듬해 독도연구소를 개소하는 한편, 2012년 9월 14일에 독도체험관을 개관하였다. 현재는 독도를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알리기 위해 영등포 타임스퀘어로 확장 이전을 준비 중이다. 이제 재단은 성과와 경험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변화상에 주목하며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특히, 활발한 학술 교류를 통해 국제사회에 재단의 학술 성과를 알리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재단은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의 싱크탱크로서,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여 동아시아의 평화 기반을 다지기 위한 연구와 정책 개발에 더욱 주력할 것이다.
박장배, 재단 북방사연구소 소장
‘코로나禍’ 중 일본 생활기
현장 리포트 ‘코로나禍’ 중 일본 생활기 지구적 규모의 팬데믹 상황 가운데 1월 초부터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해외로 나가기를 다들 단념하고 지내는 시기에 외국에 나와 있으니 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며 1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서는 현재의 코로나 시국을 ‘코로나禍재앙, 재난’라고 부른다. 오죽하면 와세다 대학에 오도록 도와주신 다니구치 신코谷口眞子 선생님이 나를 만나 건넨 첫 마디가 “1월 초에 올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진짜 일본에 올 수 있을지는 반신반의했다.”였다. 2주 동안의 호텔 격리를 마치고 도쿄에 도착한 나는 거주 신고를 해야 한다는 학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숙소가 위치하는 신주쿠구新宿区 구야구쇼区役所(구청)에 가서 이런저런 서류를 제출하고는 ‘마이넘버카드’를 발급받았다. 마이넘버카드는 일종의 주민 증명서여서 도쿄도가 나를 신주쿠구의 거주자이자 백신접종 대상자로 파악한다는 의미이고, 국민건강보험증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구야쿠쇼에서 신고를 한 게 1월 말이었는데 마이넘버카드를 받아 가라는 우편 연락이 3월 말에 왔다. 행정 업무에서 ‘빠름’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내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90년대 하반기,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일본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빈번히 체감했다. 그리고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2021년에 다시 주민이 되어 생활해 보니 예전같은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때와 비교해서 유난히 달라진 거라면 이제는 동네 어느 마트나 편의점에 가더라도 한국의 신라면과 소주, 막걸리가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대형 마트에서 비비고 육개장과 고기만두를 사기도 했다.
윤유숙,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