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와자 유적의 위치
정가와자 유적 | 심양역 | 번호는 발굴 지점
정가와자鄭家窪子유적은 중국 요령성 심양에 있다. 심양역에서 남서 방향으로 10km 정도 달리면 ‘정가와자청동단검묘진열관鄭家洼子靑銅短劍墓陳列館’이라는 푯말과 함께 박물관이 보인다. 정가와자 유적은 고조선을 전공하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6~5세기 고조선의 수장首長이 잠든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고조선은 중국 고대 문헌인 『관자管子』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 적힌 춘추시대 제齊 환공과 관중管仲(?~BC 645)의 대화 속에 고조선의 특산물로 문피文皮가 나온다.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은 제와 왕래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정가와자 유적에서 발견된 무덤의 연대가 이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무덤이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6세기부터이니,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심양 지역에서 살았던 이들인 것이다.
1 M6512호 무덤의 복원 모습과 출토 유물
2 출토된 장화의 모습
3 출토된 장화의 복원도
고위직 엘리트 남성 유물 900여 점과 함께 묻혀
유적에서 비파형동검·선형동부·각종 장신구·거마구車馬具 등의 청동기와 다량의 토기 및 석기가 출토됐다. 목관을 사용한 토광묘, 목관 대신 항아리를 관으로 사용한 옹관묘, 묘실을 나무판자로 만든 다음 주검을 안치한 목곽묘 등 여러 종류의 무덤이 발견됐다. 이 가운데 묘실이 크고 부장품이 많은 무덤은 지배 엘리트가 묻힌 곳이다.
우리 학계는 이 무덤에 묻힌 엘리트가 고조선의 수장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관자』에 기록된 고조선의 위상이 정가와자 무덤에서 보이는 엘리트의 위상과 잘 어울린다고 보는 것이다.
가장 높은 지위의 엘리트 무덤은 M6512호 무덤이다. 무덤방의 가로와 세로 길이만 각각 3m와 5m 규모다. 여기에 나무 판재를 세워 무덤방의 외벽을 만들고 목관을 따로 만들어 주검을 안치했다. 목관의 길이도 2m이니 현대인의 그것과 유사하다.
목관 안에서 나온 사람 뼈는 분석 결과 50세 이상의 남성으로 판명됐다. 이 남성은 각종 무기, 화려하고 정교한 장신구, 말 장식과 수레의 부속품, 거울 등 400여 점의 청동기와 같이 묻혔다. 토기, 석기, 짐승의 뼈나 뿔로 만든 골각기骨角器 등을 다 합치면 900여 점이나 된다. 무덤방의 가장자리에서 순생殉牲된 동물 뼈도 출토됐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왕릉과 같은 금관은 나오지 않았으나 이곳에 묻힌 이가 고조선의 수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좌)2004년에 촬영한 정가와자 진열관, (우)진열관의 현재 모습
북·중이 합동 발굴한 유적 위에 세운 진열관
유적 조사는 1958년에 시작돼 1962년과 1964년~1965년에 걸쳐 완료됐다. 북한이 중국과 합동으로 발굴하기도 해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는 유적이다. 게다가 이 유적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로 추정되는 혼하渾河 남쪽에 있다. 한대에는 고조선이 서쪽 2천여 리를 연燕에 빼앗긴 후였으므로, 이 유적이 조성된 시기의 고조선에게 이곳은 생활의 중심부에 가까웠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살았을 주거지나 마을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마을 가까운 곳에 묘역을 조성했으므로 분명 인근에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이 유적 위에는 ‘정가와자청동단검묘진열관’이 세워져 있다. 재단은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관리 현황을 파악해 왔다. 유적의 본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무덤 하나가 전시실 안에 복원돼 있을 뿐이다. 진열관은 1985년에 처음 개관했으나 재개발로 인해 2003년부터는 폐쇄됐다. 그동안은 창문을 통해 안쪽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도로와 공원이 정비되면서 2016년 5월 밋밋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로 재개관했다. 옛 건물은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이 건물 외관에 장식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곳이 고조선의 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정가와자 사람들의 생활을 복원한 전시장의 모습.
뒷면 벽화에는 중국 진나라의 무기를 그려넣었다.
토착문화가 삭제된 동북공정식 전시
진열관 입구에는 거대한 비파형동검 조형물이 있다. M6512호 무덤은 동쪽 전시실에 복원돼 있다. 발굴과 유물 출토 상황을 재연하여 제법 실감 난다. 유물 대부분이 복제품인 것은 아쉽다. 그런데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무엇인가 어색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게 된다. 정가와자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한 그림에 토착문화가 아니라 중국 진秦나라의 무기와 마차를 파노라마로 전시해 놓았다. 유물 설명판에는 ‘비파형동검’이라는 정식 용어 대신 ‘동북계東北系 청동단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중화中華의 영향을 받은 지역 문화를 강조한 문구가 곳곳에서 눈에 띤다.
‘모든 것은 중국의 영향 하에 발전했다’는 ‘동북공정식 역사 인식’이 정가와자 사람들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문화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일방적 수혜’로 치부하는 중국 정부의 시대착오적 문화패권주의는 현대판 전파주의와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19세기 전파주의는 역사 왜곡을 낳았고, 실제로 폭력으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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