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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제관계사 연구
주목! 이 연구 대한제국 국제관계사 연구 대한제국은 전통시대의 조선이 제국주의 국제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라의 기틀을 바꾼 국가개조의 산물이었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革舊圖新)”하기 위한 근대적 개혁완수가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의 지상과제였다. 그런데도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에 병탄됨으로써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근대적 개혁정책들이 미완에 머물고 말았다. 이처럼 제국이 초단기간 내에 멸망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대한제국의 역사와 전통시대 한국사의 차이점은 한반도 지정학 변화와 관련이 깊다. 한국은 전통시대에 중국의 변방에 불과했으나 산업혁명을 계기로 인공동력이 장착된 철도와 증기선이 등장함으로써 한반도 지정학이 일변하였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철도 부설에 착수한 러시아와 태평양의 해양제국을 꿈꾸던 미국이 한반도 지정학에 주목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역사는 열강의 국제관계와 연동하게 됐다. 따라서 현재의 “한반도 위기”가 미중일러와 연결된 글로벌 위기와 연동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한제국은 주권국가였고, 중립국임을 선포(1904)했음에도 이를 침략한 일본제국의 불법행위에 국제법은 작동하지 않았다. 국제법을 위반했던 일본 역시 제재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것이 바로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을 구명하기 위해 국제관계사의 방법론을 소환했던 이유다.
최덕규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연구위원
문명과 야만, 두 얼굴의 일본·일본인 『일제강점기 학살당한 한국인들』을 말한다
저자와의 만남 문명과 야만, 두 얼굴의 일본·일본인 『일제강점기 학살당한 한국인들』을 말한다 필자는 독립기념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9년 11월 일본 도쿄(東京) 교외에 있는 국립역사민속박물관과 오사카(大阪)에 있는 골동품상점을 방문해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 만행을 목격한 화가가 그린 그림 원본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震災)라고 하는데, 그림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뒤 동북아역사재단에 재직하고 있을 때인 2013년 7월 말에 다시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을 방문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 관련 내용을 전시하고 있나 찾아봤다. 그런데 한인 학살 관련 그림과 자료, 지진 관련 영상이 전시·상영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감추고 싶은 자료를 일본 국민들에게 나름대로 전시, 교육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그림과 자료들이 그대로 전시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재단은 2013년 8월 말에 일본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 문제 관련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연말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을 간행했다. 또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關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論創社, 2016)을 출판, 다수의 일본인들도 진상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필자 역시 이 책에 『독립신문』 보도 한인 학살 관련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한국 정부 기록을 통해 본 간도사
사료의 재발견 한국 정부 기록을 통해 본 간도사 간도는 두만강 및 압록강 북쪽의 만주 일대를 가리킨다. 이는 다시 세분해서 두만강 이북 지역을 동간도 또는 북간도라고 하고, 압록강 건너편 일대를 서간도라고 했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의 멸망 이후에는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에서 멀어졌다. 청 건국 이후에는 한동안 봉금(封禁)돼 소속이 불분명했고 거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함경도의 기근을 계기로 수만 명 단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면서 간도 지역은 본격적으로 개발됐고, 이는 2020년 현재 인구 200만에 육박하는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구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간도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논쟁은, 18세기 세워진 백두산정계비 문제나 19세기 대한제국과 청국 사이에 벌어진 국경 비정 문제, 그리고 1909년 일본과 청국 간에 맺어진 간도협약 등 간도에 대한 소유권 문제에 집중되어온 경향이 크다. 실제로 재단에서 이전에 간행했던 자료집들도 『조·청 국경회담 자료집』(2005), 『백두산정계비 자료집』(2006), 『조선시대 북방사 자료집』(2007), 『역주 ‘감계사등록’(상·하)』(2008, 2010), 『국역 ‘동문휘고’ 犯越, 疆界, 勅諭·犯禁·刷還 사료』(2008~2013) 등 대부분 국경 비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홍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고구려 고도, ‘집안(集安)’
역사의 현장을 가다 고구려 고도, ‘집안(集安)’ 2000년대에 들어 중국 정부는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일환으로 진행된 집안 지역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함으로써 가히 집안은 고구려 시대 이후 최대의 발전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중 간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의 충돌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천 수백 년 동안 묻혀있던 고구려의 실체가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집안 지역에서 발견된 규모가 큰 적석묘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대략 24기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태왕릉, 장군총, 서대묘, 임강묘, 우산992호묘, 우산2110호묘, 산성하전창36호묘, 칠성산211호묘, 칠성산871호묘, 마선2378호묘, 천추총, 마선2100호묘, 마선626호묘 등 13기는 왕릉으로 확정했고, 나머지 11기는 왕릉급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은 모두 7층의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올린 계단식적석묘로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지만 심하게 무너져 일부만 남아있고 무덤 위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글자가 찍힌 벽돌이 발견됐다. 이 두 무덤은 고구려 적석묘 발전 단계에서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인지 장수왕인지 논쟁이 되고 있다. 집안 지역의 고분 중에서 가장 서쪽인 마선향 끝자락 언덕에는 훼손된 커다란 돌무더기가 보인다. 이 서대묘는 분구의 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드러나 있어 학계에서는 전연 모용황의 침입 때 파헤쳐진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구하를 거슬러 가면 평지성인 국내성과 짝이 되는 환도산성이 나타나고 그 아래 계곡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적석묘와 봉토묘가 뒤섞여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산성하고분군이다. 형무덤이나 아우무덤과 같은 중대형 적석묘와 ‘왕(王)’자묘, 미인총, 귀갑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벽화무덤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 정비를 마치고 ‘고구려고묘박물관(高句麗古墓博物館)’으로 개장했다.
고광의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인 유자명의 두 가지 직업 이야기
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국제인 유자명의 두 가지 직업 이야기 사실 낯선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고 자활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유자명(1894~1985)은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2019년 6월초에 독립운동가 유자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유자명의 고향을 찾아볼 생각을 했는데 벼르다가 2019년 12월 24일에 지인과 함께 길을 나섰다. 유자명의 생가는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 404-4”라고 하는데 막상 보니 길옆 논가였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을 노인에게 “유자명 선생에 대해 아세요?”라고 물었다. 참 놀랍게도 그분은 “내가 손자요!”라고 하셨다. 얼굴을 보니 유자명 선생과 닮은 점이 있었다. 성함이 유인탁이라는 손자분은 “여기 이마가 닮았어요.”라고 하셨다. 마침 손자의 집도 생가터 바로 옆이었다. 그분은 유자명의 생가를 설명해주셨다. “저기는 옛날에 물이 적을 때는 밭도 되고 논도 되고 그랬어요. 저수지가 없을 때는 밭이었다가 도랑물이 들어오니까 논으로 했어요.” 손자분은 유자명의 여정을 얘기하면서 자기 할아버지의 운이 좋다는 얘기를 여러 대목에서 하셨다. “할아버지는 오시려고 대만 갔다가 육이오가 나서 비행기가 탁 막혀서 못 오셨어요. 안 들어오신 게 얼마나 다행이신지 몰라. 할아버지가 운이 그렇게 좋아요.”
박장배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