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미국UCLA 한국학 연구소와 재단의 공동 주최로 LA한국 문화센터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회의 ‘고구려와 그 이웃들 :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발표 논문 중 서울교육대 임기환 교수의 ‘고대 동북아의 국제질서 - 4~7세기를 중심으로’의 글을 세 차례로 나누어 요약 게재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차례
① 4세기의 동북아의 국제질서
② 5~6세기 동북아 국제정세
③ 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의 변동
420년 송의 건국,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433~434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 439년 북위의 화북지역 통일 등은 동북아시아의 국제 환경이 새롭게 바뀌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북위가 화북 지역을 통일함으로써 130여 년이나 계속된 북중국의 5호 16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북위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북위에 대항하는 주위의 인접 국가들은 새로운 국제 관계를 모색하였다. 그 결과 북위를 가운데 두고 중국의 남조 송 북쪽의 유연 및 서쪽의 토곡혼, 그리고 동쪽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며 북위를 포위 견제하는 한편, 각자 북위와 우호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이들 국가 사이에 맺어진 적대 관계의 중심축은 북위 대 남조 국가, 북위 대 유연이었다. 따라서 최강대국인 북위를 사이에 두고 남조 국가와 유연은 상호 연결하여 북위를 남북 양쪽에서 위협하였다. 북위가 남조를 정벌하면 유연이 배후를 위협하였고, 반대로 북위가 유연을 공격하면 남조가 뒤에서 공격하였다. 이것이 북위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갖고도 끝내 남조나 유연을 정복하지 못하였던 배경이었다. 따라서 이들 삼국 간에는 역관계의 유동성을 바탕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세력 균형을 기본축으로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 동북아 방면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고구려는 이들 3국과 등거리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은 일차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에 대한 교섭과 견제였다. 고구려와 북위는 서로를 잠재적인 위협 세력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또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계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양국이 모두 눈앞에 군사적인 대결 상대를 놓아둔 상황에서 양국 간의 분쟁을 확대해 갈 수는 없었다. 특히 고구려가 남조 국가 및 유연과의 연결을 도모하는 견제책을 구사하자 적대세력으로 포위된 북위 역시 가급적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양국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며, 빈번한 사신 교환과 문물 교류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중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사이에는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나제 동맹, 국제질서를 재편하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세력이나 북방 유목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가운데,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즉 세력권의 외곽에 거란(契丹)과 말갈의 일부를 거느리고, 내몽고 동북부 지역에 있는 지두우(地豆于)와 남실위 등에도 세력을 뻗쳤다. 또 한반도 내에서는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압박하면서 한반도 중북부 일대를 차지하였고, 신라에 대해서도 정치적·군사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 국제정세의 주요 변수였다.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금관가야가 붕괴되면서 가야 지역 내의 정세가 변화하고, 421년 이후 왜가 송과 직접 교섭함에 따라, 이전과 같은 백제 중심의 교역과 동맹체제는 균열되었다. 이에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에 주력하였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차였기에, 나제동맹은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특히 고구려의 군사적 남하 위협이 커져가면서, 나제동맹도 군사동맹으로 이어졌다.
434년의 나제동맹은 그 이전 백제-가야-왜의 동맹축과 고구려-신라의 동맹축이 대립하는 구도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새롭게 국제질서를 재편한 계기가 되었다. 이 나제동맹은 교역망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군사적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결과로서, 이제는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요인이 점차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과거 고구려·백제 중심의 교역망과 동맹 체계가 해체된 데에는 신라나 왜의 국가적 성장이 주된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 이외에 신라·왜 등의 성장으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더욱 다원화되었다. 5세기 중반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갖는 국제질서 상의 의미가 높아지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변화상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5~6세기에는 만주·한반도·일본 지역의 국제관계가, 중국의 남북조나 북방 유목세력의 국제관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개되어 왔다. 물론 양 권역이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세력 변동의 연관성이 미약하였다. 그리고 양 권역의 여러 국가 간의 교섭을 매개하는 외교 형식은 주로 책봉과 조공 관계였다.
다원화된 동북아 질서와 ‘조공-책봉’ 관계
고구려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 교섭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대남조 외교를 구사하였다. 북위 역시 배후의 안정이라는 면에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 남조의 입장도 북위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고구려와 외교적 이해가 일치하고 있었다. 백제도 남조와 교섭하고 있으나 그 성격은 고구려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백제는 대고구려전략을 위해 왜나 신라와의 교섭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왜 역시 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 외에 남조와 직접 교섭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 이외에 신라·가야·왜 등의 국가적 성장으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더욱 다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북아에서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갖는 국제질서 상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 등 동북아의 제국가가 중국의 제왕조와 맺고 있는 책봉·조공 관계는 외교 관계의 한 형식으로서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면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봉이나 조공이 갖는 현실적인 기능도 서로 다르고, 이에 따라 책봉·조공관계에 대한 서로의 인식도 차별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적 인식을 전제로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이란 외교 형식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은 피책봉국의 자립성과 독자성에 대한 남북조 왕조의 용인이었다.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 관계의 다양한 내용과 차별성을 고려하면, 이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하나의 ‘책봉-조공체제’로 파악하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남북조 시기는 중원 왕조가 분열됨으로써 주변 제국, 즉 피책봉국이자 조공국의 주체적 입장이 책봉·조공 관계에서 보다 강하게 드러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