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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한반도 패권의 중심이 되었던 남한강 일대
  • 유화연(중앙대 역사학과 2)

역사학도가 떠난 여행


역사가 흐른 자리에는 흔적이 남고, 이 흔적에 상상력과 지식을 더하면 시간에 묻혀있던 역사가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의 현장을 찾으면 그 모습을 직접 마주하곤 하는데, 이 감격을 아는 역사학도라면 답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답사를 떠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가을이 오면 역사학도들은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역사의 현장으로 향하게 된다.

     

남한강과 함께 흘러간 중원의 역사

강원도 산맥에서 발원한 수많은 지류들이 이룬 강물은 영월,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를 지나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는데, 우리는 이 물줄기를 남한강이라 한다. 남한강은 국토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한반도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그래서 이 일대의 역사와 문화가 남한강그 자체로 설명이 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남한강은 우리나라의 남북과 동서를 이어주며 지역 간 교류에 매우 중요한 길목이 되었기에, 이 길목을 장악하는 것이 곧 중부 일대의 교통과 경제, 나아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한강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기도 하고, 고려 왕실의 지대한 후원을 받으며 정치·경제의 요충지가 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마지막 전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남한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까지 잘 남아 있는 곳은 충청북도 충주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충주 지역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충주는 남한강 중류의 핵으로써 쟁패의 관건이었던 한강 하류와 연결되어 있고, 소백산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충주의 주인이 된 것은 백제였다. 4세기 중엽, 마한의 소국에서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병합해 성장한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소유하며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4~5세기 무렵 광개토대왕이 백제 정벌에 나서면서 점차 위축되었고,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면서 백제는 한강 유역 일대를 완전히 빼앗긴다. 충주는 이 무렵 고구려로 편입된다. 승승장구하던 고구려는 6세기에 이르러 혼란을 겪는데, 이때 신라는 북진을 단행하여 충주를 비롯한 남한강 유역을 점령한다.

     

충주 고구려비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이러한 역사가 담긴 유적지들은 충주 곳곳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5세기 말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힌 뒤에 세운 기념비이다. 한때 이 비석은 마을의 대장간 기둥으로 사용되고 1972년 대홍수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남한강 일대의 고대사를 고증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없었다.

     

그러나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비문의 내용을 통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삼국의 관계와 고구려 남하정책, 천하관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가진 충주 고구려비는 야외에서 비석이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시관 안에 세워져 있다. 원래 서있던 자리에서 주는 현장감이 사라져 아쉬운 면도 있지만, ‘충주고구려비전시관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전시관에는 충주의 역사부터 고구려의 역사, 문화유산, 설화, 생활상 등을 쭉 설명해 놓은 뒤 고구려비를 세워 놓았고, 그 옆에 탁본과 비문에 대한 설명, 발굴 과정 등을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비석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관련 역사와 의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충주 누암리 고분군과 탄금대

고구려에 이어 충주의 주인이 된 신라의 흔적을 엿볼 대표적 유적지는 충주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이다. 충주는 신라의 중앙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소백산맥 이북의 북방영토를 관리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영토 확장을 위한 북진정책의 전진기지였다. 신라는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방에 특별히 작은 서울을 두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국원성으로 불리던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여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새로 편입한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과 지역적 다중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지방 중심도시에 중앙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문화 전파의 거점 역할을 하도록 했는데, 충주 누암리 고분군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조성되었다. 고분들은 꽤 넓은 부지에 밀집해 있는데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 쭉 돌아보면 크고 작은 고분들이 230여 기 정도 분포되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했던 짧은 굽다리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제 귀고리 등을 통해 고분들의 주인을 신라 귀족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신라 귀족은 신라가 의도적으로 중앙에서 이주시킨 귀족들일 것이다.

     

신라의 중앙 귀족 이주정책은 충주 탄금대(명승 제42)’와도 관련이 있다.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던 진흥왕은 가야 등을 편입하면서 주민 간 방언 차이를 극복해야 했고,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하였다. 고대 사회에는 식자율(識字律)이 현저하게 낮아서 일반 백성을 통합하는데 음악의 역할이 상당했다. 그래서 신라로 망명한 가야의 우륵에게 신라의 예악을 완성할 것을 명했고, 충주 지역에서 음악을 통해 백성들을 통합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종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역 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정책을 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

     

충청북도하면 사람들의 느긋한 말투와 함께 여유롭고 넉넉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 안에 담긴 역사가 사실 무척이나 치열했다는 것은 신선한 반전이다. 평화로운 충주와 남한강 유역에서 과거 격전의 흔적을 엿보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이 매력이 궁금하다면 역사와 함께 흘러온 남한강을 찾아 떠나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