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西域)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동쪽은 바다 건너 태평양이 펼쳐져 있지만 그 끝에 아메리카가 있다는 것을 지도상으로 알아버린 탓에 더 이상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경(憧憬)에서 시작한 서역 여행은 반복되었고 이제는 예전에 알았던 서역의 더 서쪽을 방랑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언제나 이 도시 우루무치다.
자유의 소리와 향기, 맛이 있던 도시
15년 전 겨울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거리거리마다 매캐한 석탄화로 위에서 서역의 갖은 향신료를 덮어쓰고 익어가는 양고기의 냄새, 조그마한 손수레 위에 갖은 건과류를 싣고 다니는 위구르 상인들, 얼따오차오(二道橋) 시장을 가득 메운 인파, 그 사이로 어디서 온 물건인지도 모를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상인들의 호객소리가 뒤섞여 진풍경을 연출했다. 차 다니는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면 여전히 당나귀가 끄는 마차 위에 일가족이 빼곡히 올라타고 흔치 않은 외국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개인적으로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문명의 충돌이었고, 그 첫날의 경험은 이후로도 자유가 남긴 화인(火印)처럼 가슴 한 곳에 남아 있다. 서역에서 겪은 경험이 쌓이고 읽은 책이 늘면서 사진처럼 남은 첫 날의 인상은 또다시 ‘동경’의 영역으로 가라앉았다. 분명히 거기에는 자유의 소리, 향기, 그리고 맛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어렵게 찾아야만 가끔 보이는 희귀한 어떤 것이 되어 가슴이 쓰리다.
어제의 화해사회(和諧社會) 오늘의 중국몽(中國夢), 거리의 벽마다 쓰인 중화민족 굴기의 표어 일대일로(一帶一路)가 묻어버린 것이 바로 내 가슴속에 여전한 그 도시의 첫 번째 인상, 자유였다. 자유가 묻혔으니 민주가 함께 묻힐 수밖에 없다. 현지 사람들(이른바 한족이라 불리는 이주자들이 이미 도시의 2/3를 채웠다)은 “자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유는 먹고 살 자유다. 그 자유를 이룬 것이 당(黨)과 국가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도 말하지 않나? “새마을운동과 유신독재가 자유를 포함한 많은 가치를 없앴다지만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초가집도 불태웠다고.” 우루무치의 인력거 행상은 사라졌다. 그때 겨우 몇 푼이나 벌었겠는가? 그들은 이제 번듯한 점포를 갖고 토방을 벗어나 우뚝 솟은 아파트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틀었겠지. 더 많은 자유와 함께(물론 통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2000년 이후 몰아친 부동산 광풍의 수익은 대부분 외부 투자자들의 몫이었다).
버거다(보그드: 몽골어로 ‘성스럽다’는 뜻) 설봉 아래 감춰진 천지(天池). 하루만 물끄러미 그 물을 바라본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 물을 통해 누구나 자연의 경이로움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높은 곳까지 올라온 유람선에 무더기로 올라타고 반 시간짜리 유람을 마친 후 사진만 찍고 내려간다. 오늘날 도시를 방불케 하는 상주인구를 자랑하는 백두산 천지처럼 버거다 봉에서 ‘성스러움’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산을 내려오면 얼따차오 시장과 거리 곳곳에서 최소한 위구르나 카자흐 상인보다는 더 많을 듯한 공안들의 시선을 통과하면 그나마 남은 성스러움의 껍데기도 다 벗겨질 것이다.
유목민들의 목장에서 국가 주도 식민지로
우루무치(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는 원래 유목민들의 목장이었다. 당대(唐代)에 이곳에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고 하나 그저 일시적이고 명목상일 뿐 동방 사람들의 발길이 이곳에 미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투르크계에서 몽골계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18세기 중반까지 이곳은 사람보다 소와 양이 수십 배나 많은 목장이었다. 텐산(天山) 허리에 자리 잡아 사시사철 물이 풍부한 곳, 청이 차지하기 전까지 이곳은 ‘준가르’라 불리는 서몽골 세력의 배꼽이었다. 청과 준가르의 격렬한 싸움의 종지부는 청군이 이곳 적화(迪化)에 병력을 주둔하면서 사실상 끝났다. 텐산 남북의 목장을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했기에 이곳을 잃으면서 유목 세계는 순환기 질환에 걸렸고 사계절 방목할 수 있는 목장은 곡식을 키울 수 있었기에 청은 이곳의 인구를 늘려갔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이들은 청의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세운 이들은 동방에서 배척당한 이들이었다. 유형수, 토지를 잃은 빈털터리 농민, 그리고 날품팔이들이 쟁기와 보습을 지급받고 면세(혹은 감세)를 약속하는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이곳으로 몰려와 땅을 갈았다. 순수하게 군사들이 운영하는 병둔(兵屯田)이 있었지만 민간인들이 장악한 민둔의 수가 늘어갔다. 이러한 국가 주도 식민의 역사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이어졌다. 한마디로 우루무치는 동방에서 온 이주 농민과 유배자들이 위구르 농민들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세계의 배꼽 위에 지은 도시였다. 이곳의 유배자들 중에는 유명 인사도 있었다. 아편전쟁의 책임을 물어 이리(伊犁)로 유배된 임칙서(林則徐)도 이곳에 한참 머물렀는데 도시 중심의 훙산공원 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동상은 물끄러미 도시를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제작되었다.
이 도시에서 자유는 금기어다. 하지만 이제는 새 단어 ‘희망’을 들고 서역 여행을 계속한다.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없다. 태어나고 커지고 늙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도시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무색무취의 마천루가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지만 뒷골목에는 여전히 끔찍하게 착한 가격과 맛으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위구르 국수가게들이 즐비하고, 대학에는 형형색색 얼굴도 생각도 다른 서북의 민족들이 모여 글을 읽는다. 고개를 들면 멀리 천산의 버거다 봉은 이곳에 인간이 발을 내딛기 전부터 짓던 그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이뤄낼 미래의 모습에 이방인도 ‘희망’을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