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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ISSUE
100주년 기념, 6‧10만세운동을 되돌아보다
  • 최은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순종의 서거와 식민 당국의 경계
 
일제의 한국 병합에 따라 ‘순종 황제’는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순종은 여전히 상징적인 ‘정치 아이콘’이었다. 그런 순종이 1926년 4월 25일 숙환으로 서거했다. 식민 당국은 3‧1운동 때처럼 순종의 서거로 민심이 동요할 것을 경계하며 일찍부터 방침을 세웠다. 경찰부를 비롯해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정복 경관들이 출동해 각지를 엄중히 감시했다.
 
국장은 고종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 훈련원에서 치르기로 했고, 국장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그런데 국장을 나흘 앞둔 6월 6일,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 활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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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종사의 최후 황상, 전 한국 융희제 이왕 전하 위독」
출처: 『동아일보』, 1926.4.26.
 
 
좌우의 연대와 계획 발각
 
시위는 중국에 있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가 구상했다. 1926년 1월경 만들어진 임시상하이부는 김찬을 책임비서로 하고 김단야, 여운형, 조봉암 등이 참여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을 지도하고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연결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 중 김찬, 김단야, 조봉암 등은 1925년 4월 조직된 제1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핵심 간부였다. 시위의 최초 계획은 김찬, 김단야가 구상했다. 
 
순종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의 만세시위 구상이 국내 조선공산당에 전달되었고, 조선공산당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기로 했다. 김단야는 5월 말경 격문 약 5,000매를 인쇄해 국내로 보냈다.
 
만세시위 준비에는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등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등 민족주의 계열이 관여했다. 권오설은 5월 10일경 천도교청년동맹원이자 조선공산당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원인 박내원에게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의 인쇄를 부탁했다. 5월 중순부터 말까지 박내원은 권오설에게 원고와 지원금을 받고 격문 5만여 매를 인쇄하고, 이를 천도교 중앙교당 내 손재기(손병희의 종손)의 집에 감춰 두는 등 배후에서 만세시위를 지원했다.
 
격문은 각 지방의 신문사 지국, 개벽사 지사,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노동단체 등에 보내기로 했으며,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해 파견하기로 했다. 서울에는 6월 8일 밤에 격문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권오설이 격문을 지방에 배포할 자금을 구하지 못하면서 지방 배포 계획은 취소되었고, 격문은 모두 서울에서 살포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권오설은 6월 10일 가두에서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6월 6일 경찰은 천도교 중앙교당 구내 손재기의 집에 다량의 격문이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날 오후 4시 반, 수십 명의 경찰을 보내 수색한 끝에 개벽사의 제본소 역할을 하던 손재기의 집에서 격문 5만여 매를 찾아내 압수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이를 천도교 측의 소행으로 간주해 개벽사와 천도교계 인사 100여 명을 체포했다. 박내원은 경찰의 압수수색 사실을 모르고 다음 날 천도교당에 왔다가 외근순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종로경찰서에 붙들려가 취조를 당한 끝에 6월 7일 오전 10시, 권오설의 존재와 그의 소재지를 실토했다. 경찰은 즉각 출동해 권오설을 장사동에 있던 그의 아지트에서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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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원지인 천도교당과 ○○서 압수된 천도교 당내 일부」
출처: 『시대일보』, 1926.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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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1897~1930)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계가 발각되는 상황에서도 조선공산당 외곽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通洞系)는 각각 별도로 격문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만세시위에 동참하기로 한 것은 5월 15일경 이병립(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간부)이 권오설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들은 뒤였다. 통동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생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생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이 속해 있었는데, 5월 26일 격문을 만들고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임무는 순종의 국장 당일 가두행렬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의 만세 함성
 
이리하여 6월 10일 순종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주로 학생들에 의해 만세시위가 발발했다. 이날 돈화문에서부터 관수교, 황금정 4정목에 이르기까지 양측 인도에 많은 학생이 도열해 있었기 때문에 만세시위는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주요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1. 단성사 건너편: 오전 8시 30분경 장례 행렬이 막 통과한 뒤, 중앙고보 학생 30~40명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 1,000여 매를 살포했다. 이선호, 유면희 등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측이 만든 격문을 뿌린 것이다. 거의 동시에 통동계에서 만든 격문도 이동환 등이 뿌리고 만세를 불렀다.
2. 장사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했다.
3. 관수교 부근: 오전 8시 45분경 이병립, 박하균 등의 주도로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학생 약 50명이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를 불렀다.
4. 경성사범학교 앞: 오전 9시 30분경 청년학관 학생 박두종과 청년 2명이 격문 1,000여 매를 살포하고 만세를 불렀다.
5. 훈련원 재전 부근: 오후 1시경 학생 1명이 구 한국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6. 동대문부인병원 내: 오후 1시 10분경에 대여(大轝)가 지나간 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측의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연희전문생 홍명식이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를 불렀다.
7. 창신동 채석장 입구: 오후 1시 25분경 홍종현(37세)이 혼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8. 숭인동 동묘 앞: 오후 2시 20분경 통동계의 중동학교 학생 김재문, 황정환이 격문 약 300매를 살포하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6‧10만세사건’, 권오설 관련 사건을 ‘6월 사건’으로 명명했고, 강달영, 이준태 등의 체포로 인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별도로 취급했다. 
 
6‧10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 중 이병립, 박하균, 박용규, 이동환, 이선호, 유면희, 이천진, 박두종, 황정환, 김재문, 곽대형 11명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大正) 8년 제령 제7호 위반’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모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유면희는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6월 사건’과 관련해서는 1926년 7월 12일 권오설, 염창렬, 박내원, 홍덕유, 김항준, 이지탁, 민창식, 이용재, 박민영, 양재식, 백명천, 김경재 12명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7월 21일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예심 중이던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 박헌영, 윤덕병이 서울에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로써 관련자들 모두 서울로 호송되었다. 당국은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7년 2월까지 사건 관계자 105명을 검거했고, 조선공산당 사건을 병합해 99명을 기소했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권오설 외 93명의 ‘치안유지법 위반’ 등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고, 대다수가 징역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특히 권오설은 징역 5년 중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 독감방에서 복역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후 병감으로 이감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어 1930년 4월경 중태에 빠졌고, 결국 그해 4월 17일 급성 폐렴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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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당일 ○○만세와 ○○선언사건의 진상」. 당시 신문에 실린 사건 관계 인물은 
맨 위 왼쪽부터 박내원, 민창식, 손재기, 백명천, 박내홍, 중간 왼쪽부터 여운형, 김찬, 권오설, 조봉암, 
아래 왼쪽부터 이병립, 이선호, 이천진, 박두종, 박하균이다.
출처: 『시대일보』, 1926.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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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사건 제1회 공판」
출처: 『동아일보』, 1926. 11. 3. 
 

6‧10만세운동이 남긴 유산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순종 국장일을 기해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학생층이 함께 관여한 사건이다. 그러나 거사에 앞서 민족주의‧사회주의 인사가 대대적으로 검거되면서, 결국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이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결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학생운동을 크게 고양시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절대독립’ 정신을 계승한 운동이었다. 둘째,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이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하며 ‘민족운동’이자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6‧10만세운동은 이후 국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 6‧10만세운동은 이후 학생운동을 크게 고양시켰다.
 
비록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사전 검거와 탄압으로 애초의 계획만큼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의 연대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학생층은 이후 항일운동의 주요 주체로 부상했다. 이런 점에서 6‧10만세운동은 실패로 끝난 미완의 거사가 아니라,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이 신간회 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였다. 100년이 지난 오늘, 6‧10만세운동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일제강점기 국내 독립운동의 변화와 확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