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포커스』 17호
지정학 시대의 도래
“혼돈과 불확실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2026년 신년사를 통해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이 2조 7,000억 달러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는 개발 원조액의 13배이자 아프리카 전체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많은 희생을 낳은 전쟁을 겪은 후, 인류는 다시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국가 간의 충돌과 문명 간의 갈등 역시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2014년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서 국제정치학자 월터 미드(Walter Mead)와 존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는 ‘지정학적 세력권 경쟁으로의 회귀’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를 각각 주장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현재의 국제 정세를 투영해 본다면, 이 논쟁은 미드의 판정승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처럼 오늘날 세계는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동북아역사포커스』 17호는 ‘지정학 시대의 부상: 재편되는 세계’를 주제로 삼았다. 국제질서의 균열이 군사·안보 문제를 넘어 경제, 에너지, 공급망 전반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지정학 재점검의 필요
이번 『동북아역사포커스』 17호에서 김영수 독도연구소장은 과거와 현재의 지정학적 충돌 사례를 통해, 지정학적 갈등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그는 20세기 초 러일전쟁을 세력 패권을 둘러싼 해양 세력 영국과 대륙 세력 러시아 사이의 지전략적 충돌의 결과로 보았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세계 무대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음에도, 북한의 군사 개입과 북러 밀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이란전쟁으로 한국이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을 예로 들며, 유라시아 분쟁이 실시간으로 한국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결국 지정학적 충돌은 한국이 직접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직간접적 대응의 필요성을 높인다. 특히 오늘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중견국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 그리고 주요 안보 협력국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은 20세기보다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지정학적 안목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지정학 위기 속 명암
지정학이 갈등과 충돌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지금은 분명 위기의 시기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군사 충돌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안보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정학 충돌은 단순히 군사·안보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경제·에너지 측면에서도 긴밀하게 연결되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처럼 교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지정학 갈등에 따른 공급망 재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해양 세력인 한·미·일과 대륙 세력인 북·중·러의 지정학 갈등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지정학 갈등이 한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방산 분야에서 한국은 유럽, 중동 등에 군사 무기를 수출하며 성과를 내고 있고,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지정학 시대’는 한국에 위험한 기회다. 따라서 한국은 과거처럼 지정학 경쟁에 수동적으로 휩쓸릴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주적인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 격변하는 지정학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안보 위기에 철저히 대응하는 동시에 기술과 산업의 경쟁력을 지렛대로 삼아 국익을 증진하는 국가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