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소개
싸우는 여자들
장면 #1.
1935년 10월 20일, 경성부 인사동 115번지의 한 가정집에서 주인아씨와 행랑어멈 간의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구경꾼이 가득 모여 있었던 그날의 싸움은 약이 잔뜩 오른 주인 여자 쪽이 본인의 멱살을 의연하게 붙든 행랑어멈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면서 철철 흐르는 피를 보고야 끝이 났다.
장면 #2.
1993년 8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터널, 한 여성이 손수 쓴 대자보를 붙이다 다가온 몇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민족'·'민주'·'투쟁'이 빼곡한 대자보들 사이, 그녀가 붙이려다 찢긴 종이 위로 '한 교수의 직위를 이용한 성희롱을 밝힙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곧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금부터 소개할 책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이아리·권혁은 지음, 푸른역사, 2026)는 이렇듯 '싸우는 여자들'의 장면으로 문을 연다.
7명의 여성 역사학자가 함께한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권인 이 책은 시리즈 가운데 현재와 가장 가까운 근현대 시기를 다룬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시리즈는 여성의 삶을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 결과물이다. 또한 대중과 더 가깝게 만나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현학적 문체를 덜어내고, 보다 쉽게 읽히도록 소설적 서술 방식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본래 이 네 번째 책의 주제는 '노동'이었다. 여기에는 뒷얘기가 있다. 출간 직전까지 제목이 몇 차례나 바뀌었던 것이다. '여자, 노동하다', '여자, 제 몫을 요구하다', '여자, 일한 몫을 요구하다' 등 여러 후보를 거쳐 마지막에 안착한 제목이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였다. 책이 나오기까지 저자들 못지않게 마음을 쓰던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가 어느 날 아침 계시처럼 떠올랐다며 건넨 제목이었는데, 듣자마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여성과 노동의 관계 자체가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는 데 저자들과 출판사가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싸우는 이야기로 여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여자, 식모살다
필자가 쓴 〈여자, 식모살다〉는 우리 사회가 근대로 들어서는 시기부터 행랑어멈, 오모니, 식모 등으로 불리며 가내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들을 책에 담아내었다. 이 글은 필자의 학위논문인 〈한국 근대 가사서비스노동의 형성과 변동〉(2023)에도 담긴 오랜 문제의식, 즉 여성의 노동과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필자는 흔히 자본주의 산업화의 징표로 여겨지는 임금노동자의 탄생이 '집 밖 일터에서의 생산 노동'이라는 전형적인 근대 노동이 아니라, 타인의 사적 공간에서 재생산 노동을 수행한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을 도맡았던 그녀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전환기를 살아간 당대의 중요한 노동자였다.
변장(變裝)한 여기자(女記者)
독립운동가이자 민간신문 최초 여기자였던 최은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던 시절(1924년 10월) 행랑어멈으로 변장한 모습
출처: 『조선일보』, 1960.1.18.
또한 책에서 묘사하는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역사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의외의 지점들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식모살다〉 편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인 「주인 아씨와 행랑어멈이 싸우다」에서는 집주인과 행랑살이의 관계가 경제적 관계로 전환되면서 주인 아씨와 싸우고 진단서를 끊어 폭행죄로 고소하는 행랑어멈이 등장한다. 「행랑어멈은 진고개로 떠나고」와 「조선 여인의 일본인 집 식모살이, ‘오모니’」에서는 하는 일 없이 도시 부랑자가 되어가는 행랑아범과 달리, 행랑어멈은 재조일본인 사회의 수요 확대와 함께 가사노동자인 ‘식모’로 도시 생활에 적응해 가는 모습이 펼쳐진다. 어엿한 직군으로 자리 잡아가던 가사노동자들은 이제 하인을 부르는 말인 '어멈'이 아니라 '식모(食母)'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都會(도회)가 그리는 만화풍경(漫畫風景)❺ 진고개
일본인 동네 ‘진고개’의 조선인 식모를 묘사한 신문 만평
출처: 『동아일보』, 1933.910.
마지막 장 「상경하는 식모들과 '식모 전성기'의 이면」이 보여주듯, 1930년대 내내 경성부 직업소개소 중개 실적의 절반 이상이 식모 소개였을 정도로 '식모 전성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농가 경제의 몰락에 따른 농촌 이탈 인구의 급증과 목숨을 걸고 상경해 생계를 도모한 여성들의 생활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자, 회사가다
권혁은의 〈여자, 회사가다〉는 다루는 시기와 대상을 달리한다. 〈식모살다〉가 자본과 자원이 모두 빈약했던 여성들이 아무리 생계 전선에서 활약해도 근대적 노동자로 그 몫을 인정받지 못했음을 이야기했다면, 〈회사가다〉는 남성 못지않은 학력과 자격을 갖춘 현대 여성들이 차별의 벽 앞에 서는 이야기다.
저자는 본래 냉전과 민주주의, 국가폭력 문제에 집중해 학위논문〈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2022)를 비롯해 학계의 주목을 받는 연구 성과들을 생산해 왔다. 촉망받는 연구자이면서도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추구하는 과정이 출산과 육아, 가정의 돌봄노동 수행과 맞물려 결코 쉽지 않았던 저자 스스로의 경험이 이 글을 쓰는 자양분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1970~1990년대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 뒤 겪었던 난관, 그리고 그 난관을 뚫어낸 투쟁과 연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장 「1990년대, 직장 내 성희롱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다」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고발의 대표 사례인 이른바 ‘신교수, 우조교 사건’을 전면으로 다루며 포문을 연다.
삼성의 사원 모집 공고
응시 자격에 ‘병역필 또는 면제자’만이 응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원 사진에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또한 눈에 띈다.
출처: 『동아일보』, 1989.4.1.
그리고 이어지는 4개의 장 「1980년대, 여자도 회사에 가고 싶었다」, 「가장 여성 친화적인 직장에서도 성차별과 싸워야 했다」, 「연대를 통해 만들어 낸 여성들의 ‘평범한 회사생활’」, 「‘직장 내 성희롱’ 처벌 명문화」를 통해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임에도 새삼 낯설게 느껴질 만큼 노골적인 직장 내 성차별의 역사를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수많은 회사가 응시 자격을 ”병역 필 또는 면제자“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남성만 채용하였다. 비교적 ‘여성친화적’이라는 은행과 사립학교에서조차 여성은 결혼과 함께 사표를 내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남자 상사가 담배 심부름을 시키며 여직원에게 지폐로 접은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승진 시험장에 여성이 들어온 것만으로 “치마를 입고도 시험을 치나” 라고 수군거리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현실을 바꾸어낸 것은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이었다. '결혼 퇴직각서'를 찢고 항의한 1970년대 중반 조흥은행의 움직임은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또한 글의 서두에서 다룬 직장 내 성희롱 고발은 각계각층의 연대 속에서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조항이 명문화되는 결실을 맺었다.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이브와 판도라까지
여성의 노동에 온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는 시도는 끈질기고도 오래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인간 여성으로 여겨지는 판도라가 금단의 상자를 열었을 때, 이후 인류를 괴롭히게 될 온갖 재앙들과 함께 ‘노동’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댄 죄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각각 평생의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형벌로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서 인류에게 노동의 고통을 가져온 원흉처럼 비난받는 판도라나 이브 역시 분명 노동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다만 그 노동이 줄곧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한편, “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때로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여자, 생존전쟁을 치르다』는 성차별의 장벽을 넘나들며 고군분투했던 ‘일하는 여성들’을 우리 앞에 불러세운다.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푸른역사, 2026)
여자들은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역사학자는 결국 사료를 통해 역사상을 밝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역사 속 여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난관에 부딪힌다.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로 남긴 사료가 적고, 기록 속 흔적 또한 미약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 여자, ○○하다』시리즈는 바로 사료의 행간과 균열을 섬세히 추적해 그 희미한 흔적을 따라가며, 여성의 행위 주체성과 실천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질문은 시리즈 각 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펼쳐진다. 남성 지식인들이 독점하던 기억과 정치의 영역을 전유하는 절부 조씨와 기생 가련의 이야기는 『여자, 기록을 가로채다』에서 만날 수 있다. 바람피우는 고려 공주와 저주하는 후궁, 명예욕을 실현하는 열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여자, 기어이 욕망하다』를 권한다. 손자와 의절하는 명문가 할머니와 전남편을 절굿공이로 쳐 죽여 복수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여자, 조용히 살지 않기로 하다』에 담겨 있다.
이 네 권의 책은 각기 다른 시대와 인물을 다루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역사 속 여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 시리즈는 그 물음에 대해, 여성들이 기록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존재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곳에서도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욕망하고, 싸우고, 일하며 역사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었다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