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5
시안(西安) 1945, 광복군 국내 진공이 무르익다
시안(西安)과 한국 역사
시안은 한국 역사와 인연이 깊다. 장안(長安)으로 불렸던 시안은 중국 진·한·수·당 등 역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고도(古都)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동서문물 교류가 활발해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성당(盛唐)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문화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고대 시안은 한반도의 유학생, 승려, 상인들이 숱하게 왕래한 곳이다. 이곳에는 고선지, 혜초, 최치원, 원측 등 삼국시대부터 우리 선인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근처 중난산 기슭에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싱자오사(興敎寺)가 있다. 싱자오사에는 당나라 때 현장 법사와 그의 고제(高弟)였던 신라의 원측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중국 국공합작(國共合作)의 물꼬가 트인 곳도 시안이다. 1936년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해 놓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힘을 합해 항일전을 펼 것을 요구한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던 시안사변은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반일운동 역량 결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