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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상 제국주의 국가의 영토 확장에 대한 이해와 화자(話者)의 전환
동북아포커스 2 국제법상 제국주의 국가의 영토 확장에 대한 이해와 화자(話者)의 전환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른 한일협약 외교권 박탈과 관련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한국은 대외적 대표권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주권국가였지만 기존에 체결된 조약의 개폐 및 존속 여부는 보호국인 일본이 행사하게 되었다. 열강은 모두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끝까지 조선과 맺은 조약을 이행하기보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승인, 양보, 타협하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화를 용인했다. 당시 조약의 형식(외양)은 합의에 의한 문서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물리적인 정복이었다. 해외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가 자국 이익을 확보하려고 이해당사국과 합종연횡하는 일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 서구열강 및 중국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대외적인 압박은 일련의 조약을 통해 진행되었다. 조선(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의 ‘병합조약’ 강제로 인해 주권을 상실하는 시점까지 관세, 내정, 외교 등 상당한 범위에 있어 주권적 권리에 대한 제한을 받았다. 조선이 주권은 보유하고 있지만, 주권적 권리 행사가 제한된 상황을 ‘반주·속국(半主·屬國)’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석우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안(西安) 1945, 광복군 국내 진공이 무르익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5 시안(西安) 1945, 광복군 국내 진공이 무르익다 시안(西安)과 한국 역사 시안은 한국 역사와 인연이 깊다. 장안(長安)으로 불렸던 시안은 중국 진·한·수·당 등 역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고도(古都)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동서문물 교류가 활발해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성당(盛唐)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문화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고대 시안은 한반도의 유학생, 승려, 상인들이 숱하게 왕래한 곳이다. 이곳에는 고선지, 혜초, 최치원, 원측 등 삼국시대부터 우리 선인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근처 중난산 기슭에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싱자오사(興敎寺)가 있다. 싱자오사에는 당나라 때 현장 법사와 그의 고제(高弟)였던 신라의 원측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중국 국공합작(國共合作)의 물꼬가 트인 곳도 시안이다. 1936년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해 놓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힘을 합해 항일전을 펼 것을 요구한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던 시안사변은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반일운동 역량 결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일본 근대 개항장, 니가타(新潟)를 가다
현장 리포트 일본 근대 개항장, 니가타(新潟)를 가다 니가타의 자연지리적 입지와 19세기 개항의 역사 일본 니가타현의 중심인 니가타시(新潟市)는 도쿄에서 북북서방향에 위치하며 조에쓰(上越) 신칸센으로 약 2시간이 걸린다. 에도 막부는 1843년 니가타를 서일본의 해운거점지로 지정하고 막부의 영지로 편입했다. 막부는 니가타에 행정기관인 부교쇼(奉行所)를 설치하고 외국 선박들을 경계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해안에 방어시설물을 구축했다. 니가타항은 1858년 막부와 미국·영국 등과의 안세이(政) 5개국 수호통상조약으로, 하코다테(函館)·요코하마(横濱)·고베(神戶)·나가사키(長崎)와 함께 개항되었다. 니가타항은 1860년 1월 1일 개항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실제는 1869년에 개항되었다. 서양 각국은 1867년 니가타시 근처 사도섬(佐渡島)의 에비스(夷)항을 보조항으로 지정한후 니가타항에 외국인 거류를 결정했다. 5개 개항장 중 유일하게 서일본 연안인 시나노강(信濃川) 하구에 위치한 니가타항은 하천의 경사가 심하고 수심이 낮아 대형 선박이 입항할 수 없는 불리한 입지조건이었다. 이후 니가타 항은 하천 개수와 제방공사를 통해 대형선박의 정박이 가능한 항만시설을 확장해가면서 개항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김현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