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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레퀴엠- 한민족 유민사, 신 니콜라이
  • 이훈석 전시기획자, 러시아 미술사 박사


자화상, 1970, 신순남



니콜라이 신? 아시아의 피카소?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니콜라이 신에게는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별칭이 있다.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문외한이라도 피카소의 이름은 들어보았으리라. 그런데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를 세계적 명성을 지닌 피카소에게 빗댄다니 의아할 수 있다. 이 또한 현대미술가들에게 으레 붙는 거장’, ‘천재등의 별칭이 그렇듯 전시 홍보와 작품 판매를 위해 호들갑스럽게 가져다 붙인 과장된 수사의 남용일까?

 당연하게도 니콜라이 신의 명성은 입체주의라는 거대한 미술사적 흐름을 탄생시킨 피카소에 미치지 못한다. 입체주의는 그 이름대로 세계를 입체적 기하 도형으로 환원하고 분석하며 재조합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며 혁신적 시도였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신의 작품세계는 어떠할까?피카소만큼의 혁신성과 급진성이 존재할까? 과연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별칭은 그의 작품세계에 부합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1950년대 이후 소련 미술계의 상황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아내의 초상, 1963, 신순남(출처: https://art-blog.uz/)(좌)    노래하는 수콕, 1985, 신순남(출처: https://art-blog.uz/)(우)

 
 

연해주 한인에서 고려사람으로

 

 ‘아시아의 피카소에게는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신이라는 공식 서류상의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신순남이다. 조선에서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먼 길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그 시대의 고려사람들이 그러했듯 서류상의 이름과 별개로 끝까지 마음속에서 놓지 않은 그의 진짜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을 고려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자어 인()이 아닌 순우리말 사람을 선호해 자신들을 고려사람이라 칭한다.

 1937년 스탈린은 극동 국경지역에서 일본의 첩보활동 예방이라는 명목상 이유로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중부지역의 한인들 또한 체포되어 강제로 이주당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조치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당시 연해주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소련 내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던 한인 사회를 와해시킴과 동시에, 연해주 한인들이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빌미로 일본이 소련을 침공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구한말부터 굶주림과 착취를 피해 반강제로 연해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은 오랫동안 공들여 일군 땅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역만리 먼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연해주 한인에서 고려사람이 되었다.

 

 

우상들, 1990, 신순남(출처: https://art-blog.uz/)(좌)                                    수록, 2002, 신순남(우)            

 

 

신순남에서 니콜라이 신으로

 

 강제 이주 당시 9세였던 신순남은 화물과 가축을 나르던 더러운 짐열차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실려 가던 사람들이 감염병과 추위, 굶주림에 수없이 죽어가던 광경과 마침내 도착한 황무지에서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평생토록 기억했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던져진 고려인들은 생활공간이 없어 토굴을 파서 지은 움막에서 살았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땅을 맨손으로 개간했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약 17만 명의 한인 중 4만 명 이상이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사망했다. 다년간 기울인 각고의 노력 끝에 고려인들은 이주지에서 벼농사에 성공했고 안정적인 삶을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던 신순남은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손자의 재능을 알아본 할머니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린 순남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상경해 그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벤코프 미술전문학교 회화교육학과를 거쳐 오스트롭스키 극장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신순남은 소련에서 니콜라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가로서의 공식 직함으로 정식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 공식 미술계와 비공식 미술계 모두 외면

 

 여기서 공식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소련의 화단은 공식 미술계와 이에 반하는 비공식 미술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식 미술계는 좁게는 예술로서의 미술이 지니는 자율성을 부정하고 체제선전을 위한 도구로의 기능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맞춘 정치적 작품활동을 하는 미술가들이었으며, 넓게는 정치색이 옅은 풍경화나 정물화, 초상화 등을 긍정적분위기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리는 화가들 또한 포함했다.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정규 미술교육기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소련미술가 연맹에 소속되어 국가로부터 주거와 작업실을 제공받는 등 안정적 창작환경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비공식 미술가들은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완전추상이나 반추상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개인의 심리와 감정을 표출하고자 했다. 이들은 당시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과 비관적 시각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미술가연맹에서 퇴출당하고 전시는 허용되지 않았다. 비공식 미술의 반체제성에 주목한 서구 컬렉터들에 의해 국외에서 유명세를 얻었던 이들도 있었으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신순남은 이러한 소련 미술계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자적 위치에 있었다. 굳이 세밀하게 평가하자면 비공식 미술 쪽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비공식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양식적인 면에서 서구와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로부터의 차용이 두드러진다. 특히 초상화에서 야수주의적 색채실험은 물론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이 엿보이는 실험적 구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는 양식적 실험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자유의 표출이 주가 되었던 비공식 미술과 별개로 주제적인 면에서 고려인으로서의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향수, 연민이 그 중심축을 이루며 발전해 나갔다신순남은 미술가연맹에서 제적당하지는 않았으나 아방가르드적 양식실험과 민족적 주제를 혼합시킨 그의 독특한 작풍은 주류 공식 미술계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또한 비공식 미술계의 중심지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가 아닌 타슈켄트에서 활동했던 그는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을 수 없었다. 공식과 비공식 양측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하고도 기나긴 교착상태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작가는 조용히 소명으로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바로 레퀴엠-한민족 유민사.

 
 

디아스포라 미술이자 아방가르드를 계승한

신순남의 작품들

 

 레퀴엠은 그가 1960년대부터 제작하기 시작해 1982년 완성한 연작으로, 1937년 강제이주라는 비극으로부터 얻은 고려인들의 문화적 트라우마의 발현이다. 문화적 트라우마란 신뒤르켐주의 문화사회학자 제프리 알렉산더가 주창한 개념으로, 한 집단이 겪은 비극적 사건이 예술작품이나 문학, 영화 등 문화적으로 재생산되어 트라우마화하는 과정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이 새롭게 재구성된다는 이론이다. 강제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던 고려인들의 비극은 가로 44미터 세로 3미터의 거대한 화폭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 군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연해주 한인고려사람으로 정체화하는 순간의 문화적 재현이다.

 ‘사랑에 관한 전설’, ‘수콕연작 등은 중앙아시아 현지 주류 사회와 동화되어 살아가는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디아스포라 일원으로서의 고민이 담긴 신순남의 작품세계의 중심축을 이룬다. 작가의 말년인 200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은 보다 정제된 구성과 색채를 선보인다. 마치 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도 디아스포라로서 점차 희미해지는 민족적 고유성을 유지하고 작품에 적용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동시에 서구와 러시아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맥을 잇는 양식적 실험 또한 마지막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순남의 작품세계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야 우즈베키스탄과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1987년 그에게 공훈예술인 지위를 부여했고, 1997년 서울에서 개최된 그의 개인전에는 고건 당시 국무총리와 송태호 문화체육부 장관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작가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전시되었던 대표작 레퀴엠은 고국에 기증되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5년 후인 2028년은 작가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피카소만큼 세계미술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거나 유명세를 떨쳤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에게 주어진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별칭은 그의 인지도나 명성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를 아시아의 피카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의 작품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작품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공통 문화유산으로 유라시아 전체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신순남, "아름다운 수콕의 찬가", 2018년 우즈베키스탄 미술아카데미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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