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진입 후 중국으로 돌아온 광복군 정진대(독립기념관 소장)
시안(西安)과 한국 역사
시안은 한국 역사와 인연이 깊다. 장안(長安)으로 불렸던 시안은 중국 진·한·수·당 등 역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고도(古都)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동서문물 교류가 활발해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성당(盛唐)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문화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고대 시안은 한반도의 유학생, 승려, 상인들이 숱하게 왕래한 곳이다. 이곳에는 고선지, 혜초, 최치원, 원측 등 삼국시대부터 우리 선인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근처 중난산 기슭에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싱자오사(興敎寺)가 있다. 싱자오사에는 당나라 때 현장 법사와 그의 고제(高弟)였던 신라의 원측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중국 국공합작(國共合作)의 물꼬가 트인 곳도 시안이다. 1936년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해 놓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힘을 합해 항일전을 펼 것을 요구한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던 시안사변은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반일운동 역량 결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 기념공원으로 조성된 시안 광복군 제2지대 본부 터(독립기념관 소장)
임시정부, 시안에 진출하다
당 말 이후 시안에는 한반도인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20세기 중반 시안은 다시 한국 역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기나긴 장정을 거친 임시정부는 1940년 국민당정부의 배도인 충칭(重慶)에 안착하고 당정군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대일(對日) 전선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가 한반도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바로 시안이었다.
당시 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곳은 화북에 이주해 온 10여 만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화북을 거쳐 동북지방, 한반도로 나아가는 전진기지로도 중요했다. 그러기에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창설되기 전인 1939년 군사특파단을 시안에 파견했다. 이들은 화북 일대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 초모활동을 전개해 광복군을 조직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광복군과 OSS, 합작하다
1940년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했다. 일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전승국의 자격으로 한국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이었다. 임시정부 및 광복군 지도부는 연합국, 특히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북상하고 있는 미국을 향해 적극적인 참전외교를 전개했다. 이즈음 한반도 문제에 부정적이던 미국정부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일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해외의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양측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1945년 초부터 광복군과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 ceof Strategic Services)은 독수리작전을 실행했다.
작전은 광복군 대원들을 뽑아 특수훈련을 시행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첩보 거점을 구축하고, 나아가 유격 활동, 민중 봉기 등 적의 후방 교란활동을 전개해 연합국의 한반도 상륙 시 이에 배합한다는 웅대한 계획이었다. 광복군과 OSS는 시안 광복군 제2지대에 본부를 설치하고 광복군 대원들에 대한 특수훈련을 진행했다. 훈련은 예비훈련과 학과교육, 야전훈련으로 이어졌으며, 각 단계마다 시험을 치러 통과해야 하는 엄격한 과정이었다. OSS 교관들도 인정하듯, 광복군 대원들은 힘든 훈련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이수했다.
광복군 이범석 지대장과 OSS 도노반 국장의 작전회의(독립기념관 소장)
작전 본부로 활용되었던 시안 두곡 광복군 제2지대 본부(좌), 무전훈련에 여념이 없는 광복군 대원들(우) (독립기념관 소장)
광복군, 국내 진입을 시도하다
1945년 8월 5일 김구, 지청천,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로 구성된 시찰단이 시안으로 날아왔다. 훈련을 마친 대원들을 사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워싱턴의 OSS 총책임자인 윌리엄 도노반(William J. Donovan)도 시안에 와 있었다. 8월 7일 김구는 도노반과 회담을 한 뒤 한반도를 목표로 하는 공동작전의 조속한 실행에 합의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제2지대 대원을 중심으로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한반도 진입을 서둘렀다. 영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점령했듯, 임시정부도 광복군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대신 8월 18일 선발대인 광복군 국내정진대 파견을 추진했다. 이범석 광복군 지대장 등 정진대와 OSS 미군사절단은 한반도로 진입했다.
8월 18일 시안을 출발한 광복군 정진대는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은 서울 진입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은 이들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인 8월 19일 여의도를 이륙해 중국으로 돌아오며 광복군의 한반도 진입작전은 막을 내렸다.
광복군이 추진하였던 국내진입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구체화되지 못했다. 비록 여의도 비행장에 28시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광복군은 국외 독립운동세력 가운데 광복된 조국에 가장 먼저 진입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원대한 군사전략을 추진하며 한국독립운동의 범위와 깊이를 더욱 확대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전개한 국외 독립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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