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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재단-UCLA한국학연구소 국제학술회의 고구려와 이웃나라들 관계를 통해 본 고대 동북아 질서
  • 교류홍보실

 

동북아역사재단은 UCLA한국학연구소(소장 존 던컨 교수)와 공동으로 지난 2월 24일(토) 오전 9시(현지시간) 미국 LA 한국문화원에서 ‘고구려와 그 이웃들 :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동북공정 등 중국의 고대사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이날 행사는 아시아를 벗어나 미국 현지에서 한·미·일의 동북아시아사 연구자들이 모여 고구려와 인접 국가 간 관계사 연구의 세계적 경향을 점검하는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는 평가다. 또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중국이 아닌 고구려를 중심에 놓고 고대 동북아 질서를 조망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서울교육대 임기환 교수, 홍익대 김태식 교수, 고려대 정운용교수, 하바드대 마크 바잉턴 교수, 웨슬리대 조나단 베스트 교수, 펜실베니아대 낸시 슈타인하트 교수, 로노크대학 스텔라 슈 교수, 와세다대 이성시 교수가 발표자로 나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와 고구려와 북방, 가야, 중앙아시아, 왜, 중국, 신라, 백제와 각기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점검했다. 또 각 분야마다 역사적·외교적·문화적 관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들 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월 24일‘고구려와 그 이웃들’국제 학술회의에서 김용덕 이사장님이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UCLA 한국학연구소 존 던컨 소장

특히 서울교육대 임기환 교수는 “‘고대 동북아의 국제 질서'에서 고구려가 동북아의 국제 관계를 주도하기 시작한 4세기부터 수·당과의 전쟁으로 멸망하던 시기까지 대외관계와 국제정세를 개괄했다. 이 글에서 임교수는 ‘광개토왕비문'은 역사상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구축한 교역망 또는 정치·군사적 동맹의 대결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즉 고구려-신라의 동맹축과, 백제-가야-왜의 동맹축의 대립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5세기 고구려·백제 등 동북아의 여러 국가가 중국의 여러 왕조와 맺고 있던 책봉·조공 관계는 외교 관계의 한 형식으로서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기능도 서로 다르고, 인식도 차별적 이었다”면서 따라서 “이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하나의 ‘책봉-조공체제'로 파악하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하바드대 마크 E. 바잉턴(Mark E. Byington) 교수는 ‘지배인가 정복인가?-고구려와 만주지역 국가 및 그 부족과의 관계'에서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환인에서 집안으로 옮긴 것과 관련, 집안지역이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척박한 곳이었다고 설명하고 새로운 수도가 가진 입지조건의 한계로 부족한 자원의 확보를 위해 옥저 지역을 지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유로 고구려는 부여와 옥저 등 고구려 북쪽과 동쪽에 위치했던 부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도 고구려는 항상 정복하려 하거나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지만 “부여나 속말말갈의 경우에서 보여지 듯 경우에 따라 일정한 정도의 지치권을 보장하기도 하였고, 이 지역의 세력들이 중국 왕조와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것까지 묵인하기도 하였다”면서 “옛 부여 지역과 책성 부근에서는 고구려 관련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는 것이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 통치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고구려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피할 수 없었던, 강력한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동북아역사재단 이성재 연구위원은 토론을 통해 “학계의 견해는 옥저지역을 고구려의 후방 보급기자로 보고 있다”면서 “이 무렵 고구려가 한창 발전기에 들어서고 있었으며, 그 성장의 동력 가운데 일부를 옥저로부터 확보해 나갔다고 이해한 것”이라면서 “옥저의 생산물은 소금에 절인 생선, 소금 등 해산물이어서 환인의 상실로 부족해진 농산물을 대용하는 자원을 확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집안지역은 현재 ‘소 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대 지역에 비해 기후조건이 좋은 편이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집안은) 오곡을 농사짓기에 알맞고 어로와 수렵에도 적합한' 그야말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로보아 집안은 외부세력에게 쫓겨 임기응변식으로 천도한 곳일 수 없고 오히려 군사방어의 요충지이면서 자체 생산력도 기대할 수 있는 당시 고구려에게 꼭 필요했던 곳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학술회의에는 UCLA의 한국사(존 던킨 교수), 일본사(허만 옴스 교수), 중국사(데이비드 스카버그 교수), 한국미술사(버글린드 융만 교수) 전공 교수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이인철 책임연구위원, 이성제 연구위원 등이 토론자로 참여해 발표자와 함께 심도 있는 토론을 이끌었다.
김용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역사문제로 한·중 양국의 우호에 금이 간다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현실적 잣대로 함부로 변형이 가해진 과거의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이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면서 “역사학자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또, “역사 왜곡을 반박하기 위해 고구려의 정체성이 부각되다 보니 고대 동북아의 관계가 마치 대립과 갈등의 관계였던 것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고구려와 주변 국가들의 관계사가 잘 정리되고 새로운 연구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 한다”고 밝혔다.
UCLA 한국학 연구소장 존 던컨 교수는 “고대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안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며 행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4세기 고구려 백제 성장 동북아 국제관계 주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임 기 환

집안 인근 고구려 고분군 유적

4세기 고구려 백제 성장 동북아 국제관계 주도 지난 2월 24일 UCLA 한국한 연구소와 재단의 공동 주최로 LA한국 문화센터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회의 ‘고구려와 그 이웃들 :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발표 논문 중 서울교육대 임기환 교수의 ‘고대 동북아의 국제질서 - 4~7세기를 중심으로’의 글을 세 차례로 나누어 요약 게재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차례
① 4세기의 동북아의 국제질서
② 5~6세기 동북아 국제정세
③ 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의 변동

고대 동북아시아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다수의 국가와 종족들이 흥망을 거듭하고 세력의 부침이 교차되는 다원화된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본 발표에서는 4세기, 5~6세기, 7세기로 3시기로 나누어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의 변화과정을 개관해보고자 한다.

4세기 동북아의 국제질서

4세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새로이 변동하는 시기였다. 중국 대륙에서 서진이 몰락하고 5호 16국시대가 전개되면서 이전의 한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국가 및 여러 종족이 정치적 운동력이 확대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러 종족을 통합하며 성장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야 등이 역사 전면으로 부상하고, 일본열도에서도 정치적 성장과 더불어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깊어졌다.
이 시기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주도하는 존재는 고구려와 백제 및 전연·후연이었다. 고구려는 4세기 초 한반도 서북부의 낙랑군·대방군을 차지하고 이후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전연과 쟁탈전을 벌였다. 전연은 중원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에 342년 고구려 침공에 성공한 뒤에는 고구려와 화평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는 전연에 패배한 후 요동 진출이 곤란해지자, 평양을 근거지로 한반도 서북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한 후 백제와 충돌하였다. 이후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반도 내에서 백제와의 공방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과거 낙랑군-진한을 잇는 교역망이 북원되어 이를 따라 고구려와 신라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4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실성왕과 눌지왕의 즉위 과정에 고구려가 개입하고, 고구려군이 신라 왕경에 주둔할 정도로 양국의 관계는 거의 신속의 수준으로까지 바뀌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서 이와 같은 성격은 나제동맹이 맺어지는 4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당시 국제정세에서 백제-왜-가야의 연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고구려의 전략이었다.
385년 후연이 등장한 이후 5세기 초까지 요동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후연이 쟁패를 벌이고, 한편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격돌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고구려 광개토왕 대에 고구려의 우세로 바뀌었다. 즉 한반도내에서는 백제를 굴복시키고,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으며, 신라를 신속국의 수준으로 세력권내로 편입하였으며, 대중국 관계에서는 후연을 제압하고 요동을 차지함으로써 4세기 이래의 요동 장악이라는 과제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 결과 동북아에서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고구려-신라 동맹과, 백제-가야-왜 동맹의 대립

백제 역시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부터 주변의 여러 국가와 다양한 교섭의 관계를 맺으면서 동북아의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의 승리 이후에는 동진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등 그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백제가 동진과 맺는 외교 관계는 신왕의 즉위에 따라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는 의례적인 수준이었다. 백제는 오히려 가야 및 왜와의 교섭에 주력하고 있었다. 백제는 근초고왕대인 364년에 가야와, 367년에는 왜와 각기 통교한 것으로 전한다.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은 백제에서 가야·왜로 이어지는 교역망의 복원을 배경으로 가능하였다.
백제와 가야 및 왜와의 교섭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서진 초기에 정비되었던 교역망이, 서진의 혼란과 화북·요동 지방에서의 격변으로 단절되었다가, 4세기 중반에 백제가 다시 이를 차례로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백제는 금강 하구까지의 해상교역망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들어 서남해안-남해안-왜로 이어지는 교역망을 다시 복원하였다.

4세기 중엽에 백제가 구축한 이러한 교역망 또는 정치·군사적 동맹망은 5세기 전반까지 작동하였는데, 그러한 면모는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있다.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난 역사상이란 바로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구축한 양대 교역망 또는 정치·군사적 동맹의 대결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즉 고구려-신라의 동맹축과 백제-가야-왜의 동맹축의 대립이다.

이 양대 축의 역사적 기원은 후한·위진대에 구축되었던 낙랑군-진한의 내륙교역망 및 대방군-마한-변한-왜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망으로 소급해 볼 수 있다. 물론 과거 후한·위진 대에는 중국을 기점으로 낙랑·대방군을 중계지로 편성된 교역망이었지만, 4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복원된 교역망은 고구려·백제가 각각 자신을 기점 혹은 중심축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한 교역망인 동시에 정치적·군사적 동맹의 축이었다.

그런데 과거 4세기 초까지 중국의 동이교위-낙랑·대방군을 중심축으로 하여 개설된 동질적인 두 개의 교역 루트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이제는 그 성격이 서로 적대적인 대립의 축으로 변화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성장과 교역망의 장악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이 점에서 4세기 중후반에 백제·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이 초래한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의 재편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음미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