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보고서
[한중관계연구소] 고조선과 낙랑을 둘러싼 쟁점을 논하다
  • 정원철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3월 22일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2016년 첫 번째 상고사 토론회를 개최했다. 재단은 한국 상고사의 다양한 연구 주제를 논의하는 학술 토론의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오고 있는데, 이는 한국 상고사의 주요 쟁점들을 논의해 달라는 각계 요구와 제안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이번 토론회는 학계의 시각 차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쟁점인 '왕검성'과 '한군현'을 주제로 선정하여 각 주제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전문가 4명이 발표하고 상호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조법종 교수(우석대 역사교육과), 박성용 박사(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정인성 교수(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과)가 발표와 토론자로 나섰으며, 종합토론은 서영수 단국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고조선 마지막 도읍 '왕검성'의 위치는?

먼저 '왕검성(왕험성)'은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으로 구체적인 위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조법종 교수는 '고조선 왕검성 위치 논의와 쟁점'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제기하여 온 고조선의 중심지와 왕검성의 위치에 관한 여러 견해를 소개하면서, 기존 논의는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를 동일한 공간으로 전제하여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문헌 기록을 분석해 보면, 위만조선이 붕괴한 시점은 기원전 107년으로 기존에 알려진 기원전 108년 보다 1년 정도 늦으며, 이를 통해 낙랑군 설치 지점과 왕검성이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서 병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왕검성의 구체적인 위치는 평양 일대나 현도군 지역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 문헌 사료나 고고학적 정황과는 어느 곳도 정확하게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들 두 지역의 공간에 관한 구체적인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박성용 박사는 '한나라 군사작전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 위치 고찰'에서 군사학을 원용한 관점에서 관련 문제를 검토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추론했다. 발표자는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에서 나타난 한의 군사작전 계획을 합동작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한의 육군과 수군의 작전 계획과 실행 과정을 분석하여 학계 통설인 왕검성 평양설은 논리에 많은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왕검성은 한 측에서 보면 소규모 병력으로 기동성 있는 합동작전과 상륙작전을 펼치기 쉬운 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 전제하고, 거리와 환경으로 미뤄 허베이성(河北省) 북동부 해안이나 랴오닝성(遼寧省) 해안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낙랑군 관련 고고학 자료의 진위와 해석

두 번째 주제인 '한군현'은 논란이 많은 낙랑군에 초점을 맞추어 평양 지역에서 확인된 고고학 유물의 진위와 성격, 관련 자료의 해석과 활용에 관한 구체적인 검토와 논의가 이뤄졌다.

정인성 교수는 '일제 강점기 토성리토성(낙랑토성)의 발굴과 출토유물 재검토'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낙랑유적에 관한 조사 상황과 끊임없이 위조설이 나오는 봉니자료의 수집 과정을 정리하였다. 그와 함께 발굴 조사를 통해 봉니자료가 출토된 토성리토성의 발굴 경과와 정리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그 결과 토성리토성의 봉니자료는 모두 발굴조사에서 출토한 것이 분명하며,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조사원들은 이를 의심하지 않고 기록하고 도면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다만 고고학 층위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당시 낙랑 발굴 붐에 따라 일부 수집가와 골동품상이 봉니를 발굴 현장에 묻어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고고학 현장에서 유물 조작 사례가 실제로 일어났던 적이 있기 때문에 봉니자료 대부분이 진품이라는 주장은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봉니자료를 제외하더라도 발굴과 출토 정황이 분명한 자료 가운데 낙랑군 평양설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 자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복기대 교수는 '한군현의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 비교-낙랑군을 중심으로'에서 그동안 이루어진 낙랑군 연구사를 검토하면서 문헌자료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미흡하고, 낙랑군을 한국사 일부로 여기고 연구를 진행한 점, 고고학 자료 해석과 활용에서 기본적인 원칙 무시, 고고학 자료의 '교역' 가능성 무시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점들이 연구에 세밀하게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향후 낙랑군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낙랑군의 위치 비정은 문헌자료가 우선이어야 하며, 중국과 한국의 문헌 기록에는 대체로 중국 허베이성 북부에서 랴오닝성 서남부 지역에 있었다고 밝혔다. 또, 낙랑군 위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보았는데, 평양 낙랑설은 중국세력 팽창에 따라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16세기 경에 이르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낙랑 고고학 자료 해석은 움직이지 못하는 자료들을 우선 활용해야 하며, 이동이 가능한 유물은 지배가 아닌 교역의 결과로 이해하고 재검토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토론회는 한국 상고사에서 제기되고 있는 핵심 쟁점을 학술 토론장에서 본격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단은 앞으로도 분기별(6월, 9월, 12월)로 상고사 주요 쟁점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한국 상고사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고 그동안 간극이 컸던 상고사 인식을 둘러싼 이견을 좁혀가는 한편, 학계의 소통과 관련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