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동학농민전쟁과 한국 근대사'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전라북도 답사를 다녀왔다. 전라북도에 있는 유명한 역사 장소들을 나열하기보다는 특정 주제에 맞춰 유기적으로 돌아보는 일정이 해당 주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답사였다.
답사 2일차에 방문한 김제(金堤)는 전라북도 서쪽 중앙에 있는 시(市)로, 지역 대부분이 낮은 구릉지와 평평한 충적지다. 때문에 김제는 대한민국에서 지평선을 관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평지로 유명한 김제지만, 시 동부에는 모악산(母岳山)을 비롯한 산들이 펼쳐져 있다.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모악산은 지역민들에게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이 산의 이름은 정상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을 한 바위에서 유래했다. 이름의 의미 때문이었는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신흥 종교들의 모태로도 유명하다. 특히 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신흥종교집단의 70%가 이 두 산에 밀집되어 있기도 했다. 우리는 모악산의 여러 종교 시설들 중 증산법종교 본부, 금산사, 금산교회를 방문했다.
신앙인과 역사학도가 다른 점
증산법종교는 증산 계열 종교들이 상제(上帝)라 칭하는 교조 강일순의 딸 강순임이 1937년에 설립한 종교다. 본부에는 강순임이 강일순 부부 시신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2층 목조건물인 영대(靈臺)와 금산사의 영향을 받은 증산미륵불을 안치한 삼청전(三淸殿) 등이 있다.
증산법종교 본부는 금평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강일순이 사망한 동곡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동곡마을은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장악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도 답사 장소로 고려했지만, 예비답사 때 마을에 들어갔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마음을 바꿨다. 다행히 답사 때 우리를 안내해주신 증산법종교 신도들은 온화하신 분들로, 답사 내내 학생들을 배려해주어 편안한 답사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신도들은 답사 자료집에서 동학(東學)과 강일순의 연관성을 서술한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단호한 어투로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종교를 역사의 형성물로 대하는 역사학도와, 신앙으로 대하는 신도들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부인 금산사(金山寺)는 본래 백제 법왕 때 지은 소규모 사찰이었지만, 신라 혜공왕 때 중건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후백제 견훤이 장남 신검 손에 폐위당한 뒤, 3개월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탈출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인조 13년에 중건했는데, 이후 금산사는 한국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지금도 금산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단연 미륵전이 꼽힌다.
미륵전(彌勒殿)은 현존하는 국내 유일 목조 3층 사찰 전각이며, 실내에는 미륵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금산사 경내에 석가모니불이 안치된 대장전(大藏殿)과 비로자나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이 함께 있는 대적광전(大寂光殿)도 있다는 사실이다. 큰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는 비로자나불, 중생을 극락정토에 왕생시킨다는 아미타불, 거기에 현존불인 석가모니불까지. 이미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현세로 내려 왔다는 미륵불이 있는데, 여기에 효험(?)이 좋다고 알려진 다른 부처들도 이것 저것 추가한 모양이다.
앞서 방문했던 증산법종교를 비롯하여 증산 계열 여러 종교들도 금산사의 이런 기복신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강일순은 평소 자신이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으로 강림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제자인 김형렬 역시 금산사 미륵불에 강일순의 영체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여, 1918년 금산사 주지를 설득하여 미륵불교라는 교파를 세우기도 했다.
안식처를 찾던 민중들의 종교적 대안
금산교회는 1908년 미국인 선교사가 지역 유지들에게 도움을 받아 건립했는데, 건물은 남쪽 5칸, 동쪽 2칸짜리 "ㄱ자" 형태다. 남쪽 5칸과 동쪽 2칸이 만나는 지점에는 강단을 설치하였다. 건립 후 1940년대까지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쪽 문과 동쪽 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예배 때는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 마주보지 않도록 했다. 이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전통 규범을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틀 안에 집어넣은 결과였다.
교회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상량문(上樑文)이 동쪽 2칸에는 한글로, 남쪽 5칸에는 한자로 쓰여 있었다는 점. 두 번째는 남쪽 칸 수가 동쪽 칸 수보다 많았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강당의 예배용 단상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교회가 지어졌던 한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상사 개설서들은 대체로 인물 중심의 서술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중국 사상사 1장엔 제자백가, 서양 철학사 1장에는 소피스트, 한국 사상사 1장에는 원효와 의상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이 과연 당시 일반적 생각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이들과 동시기를 산 식자층, 기층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이 '아래에서 시작한 개혁'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기계적으로 대답하지만, 정작 전쟁에 참여한 기층민들이 어떤 생각으로 참여했는지는 무관심하지 않은가? 만약 동학농민전쟁을 색다른 시각에서 음미하고 싶다면 정읍의 만석보터, 전봉준 고택,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을 들르는 것보다 김제 모악산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모악산의 종교 시설들은 동학농민전쟁 패배 후, 안식처를 갈망하던 기층민들에게 종교적 대안을 제공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기존 역사서술과 다른 방법으로 동학농민전쟁의 전체상에 접근해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