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삼국통일’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어린 마음에도 아쉬움과 불만이 많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 밑바닥에는 여전히 이러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는다. 신라나 백제가 미워서가 아니 라 무언가 짙은 회한과 아쉬움 때문이다. 금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동북아역사재단 대외협력실로부터전화 한 통을 받고 이순의 나이를 훌쩍 넘겼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흥분이 일었다. 재단 전문연구위원 및 몇몇 언론인들과 일본 고마군 창설 1,30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고마’란 ‘고려(高麗)’를 일본식으로 부르는 말이고, 옛날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불렀다. 나는 ‘그래, 이번 기회에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고마군에 꼭 한번 다녀오자!’라고 다짐하였다.
일본 내 고구려 유민들의 터전이 된 고마군
‘동명보장 고구려 28대 705’는 가장 간단한 고구려 왕조의 표현이다. B.C.37년 동명성왕에 의해 창건된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년)과 장수왕(재위 413~491년)
시대에 이르러 동북아 최강국이 되었고,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하기도했다. 지금도 우리는 광개토대왕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 드넓은 만주벌판을 달리던 민족의 기상을 그리워한다. 장수왕 때는 남진정책과 더불어 부왕이 일구어 놓은 넓은
땅에 잘 갖추어진 제도, 그리고 선진적인 문화를 이루어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이 확실히 자리 잡았다. 이에 신라와 백제도 자극을 받아 분발하면서 보다 발전된 나
라를 이루어나갔음을 기억한다.
강성했던 고구려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국제 정세를 오판한데다 연개소문 사후 권력다툼에 따른 내분으로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당연합군의 신라 특공대 500여 명에게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보장왕의 치욕적 굴복 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풍전등화에 이른 666년, 보장왕의 아들로 일본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 파견되었던 약광(若光)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야마토 정권은 716년 당시 동국(東國, 현재의 간토 지방) 7개 지역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 1,799명을 모아 도쿄 서북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오늘날의 사이타마현 히다카시 일대 에 ‘고마군’을 설치하고 약광을 초대 군장으로 삼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48년간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떠돌던 고구려 유민들은 비로소 정착을 하게 되었고, 이때 고마군 사람들이 지도자인 고마약광을 모시기 위해 세운 신사가 바로 고마 신사(高麗 神社)다.
미개발 지역을 개척하면서 훌륭하게 지방을 다스린 약광은 크게존경받았고, 사후에는 신사에 모셔져 고마군의 수호신이 되었다.그래서 고마 신사는 재일동포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도 유명 신사 중 하나로 꼽힘과 동시에 매우 영험한 신사로 통하였다. 고마 신사에 참배한 뒤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오른 사람이 6명이나 되며, 국가적 재난이 발생할 경우 이 곳에 와서 빌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말도 있다. 또한 지금까지 1300년 동안 한·일관계를 이어주는 가교의 한 축이되어 왔다. 오늘날 같이 양국의 관계가 어렵고 불편한 시기에는 고마 신사가 한·일 양국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바로 이러한 고마 신사, 고마군 설립 1300주년 기념행사에 어찌 참석하고 싶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일관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 고마군 창설 기념행사
4월 20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동경 하네다 공항에 내린 ‘역사현안 유적 답사단’은 당일 여러 가지 의미를 되새겨 볼 수있는 야스쿠니 신사와 21일에는 닛코 동조궁, 22일에는 아오
야마 묘원에 있는 김옥균의 묘와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의거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23일 이번 탐방의 목적인 고마군 창설 130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고마 신사에서 진행된 기념행사는 고마군 창설 1,300주년 기념비 제막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내 한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마 신사 경내에 세워진 고마군 창설 기념비는 우 호, 친선, 협력을 통해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숙명적 한·일 관계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제막식에는 고마약광의 60세손인 고마후미야스(高麗文康, 50) 궁사(宮司, 신사의 최고 신관),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으로 친한파였던 고(故) 다카모도노미야 친왕의 비인 히사코 여사, 하세 히로시 일본 문부과학상,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와 고려약광회 김영진 이사장 그리고 이번 행사를 지원한 동북아역사재단 김호섭 이사장 등이 참석하여, 이 행사가 양국 정부 간고위급 공식 행사임을 말해주었다. 계속된 기념행사에서는 일본 측 문부과학상과 우리 측 대사의 미래지향적 한·일 친선, 우호, 협력관계를 위한 축사가 이어지고, 양국의 민속 공연에 이어 공식 오찬이 있었다. 특히 일본 황족으로서 한·일 우호, 친선을 강조한 히사코 여사의 오찬 인사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행정단위로 ‘고마군’이라는 명칭은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1896년 사라졌지만 신사를 중심으로 한 히다카시 일대에는 여전히 ‘고마’라는 말이 고구려의 얼과 함께 남아 있다. 마을 복판을 흐르는 강 이름과 이곳의 제일 큰 택시회사 이름이 ‘고마’이고, 학교나 지하철역 이름에도 여전히 ‘고마’라는 말이 붙어 있다. 우리도 여전히 오늘날 국제무대에서 남·북을 막론하고 고구려, 고려에서 연유하는 ‘KOREA’를 국명에 넣고 있지 않은가!
“뿌리를 잊지 않는 고마 신사는 1300년 동안 한·일 관계가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일의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이타마신문의 마루야마 아키라 상담역의 말을 뒤로 한 채 하네다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을 다녀오던 그 어느 때보다 만감이 교차하던 순간, 벌써 서울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밉지만 배울게 많고 또 상생을 위해 함께 가야 할 일본과의 거리가 역사적·지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것인가! 새삼스러웠다. 일본을 방문하는 모든 한국인, 특히 정치인과 학자들은 필히 몇 번이고 고마 신사를 찾아보며 한·일관계의 미래를 조망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