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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남자현, 동아시아 시련기 끝없는 자기혁명의 불꽃여성
  • 이상국 《나는 조선의 총구다 - 남자현 평전》 저자
남자현남자현(1872-1933). 아직도 그녀의 이름은 낯설다. 독립운동사의 찬란한 이름을 무명(無名)의 무명(無明) 속에서 구출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무력감이 작지 않다. 지난해 여름에 나온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이 남자현을 소재로 했다는 소문이 돌아 허겁지겁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무장투쟁가 안옥윤(전지현 역)은, 당시 만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활약했던 여성이며 일제 조선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점을 빼고는 남자현과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친일 앞잡이의 쌍둥이 딸 중 하나로 태어나 살부(殺父)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안옥윤 만큼이나, 남자현의 삶은 놀라운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 여성을 진정한 혁명가라 부르고 싶다. 조국을 위한 투쟁가일 뿐 아니라,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스스로의 삶 자체를 크게 바꿔나간 대담한 결단이 놀랍다. 24세 때인 1896년, 의병항쟁을 하던 남편이 전사했을 때 그녀는 뱃속에 3대 독자를 품고 있었다. 경북 영양의 시골마을. 자손이 귀한 양반가의 허물어진 기둥을 일으켜야 하는 미션 앞에서, 관청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을 정도로 부모를 섬겼고, 양잠과 같은 새로운 산업에 눈을 떠 생업의 혁신을 도모했다. 이 초기의 삶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 질긴 생명력의 혁명이었다. 그녀는 역경 속에서도 부모 봉양과 유복자의 육아를 철저히 해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 진정한 혁명가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기 직전 그녀는 서울로 온다. 영양의 교회에서 알던 이들의 네트워크로 민족적 거사가 있음을 미리 알게 되었고, 그 항쟁에 적극 동참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이 결단은 남자현이 자신의 생을 180도 바꾼 혁명이었다. 자식이 스물 네 살 되던 해, 만세운동을 벌이던 그녀는 홀연히 제대로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만주행을 감행한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초기 교육사업을 통한 독립군 지원 역할을 했지만 서서히 총을 들기 시작한다. 갈라진 독립단체들의 갈등과 내분 속에서 그녀는 단상에 뛰어올라 혈서를 쓰며 통합을 외쳤다. 전투를 치르고 동상에 걸린 독립군 병사들을 직접 돌보는 대모로서의 따뜻함도 지녔다. 1926년 4월, 54세의 남자현은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계획으로 만주에서 나와 서울 혜화동에 잠입했다. 독립 무장투쟁가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25일 순종의 승하로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던 때를 택했다. 거사 직전인 28일 청년 송학선이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졌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귀환했다. 1927년 도산 안창호가 중국 관헌에 검거된 길림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구출에 앞장섰던 이도 남자현이었다.

 

1932년 하얼빈에 리턴 국제조사단이 왔다. 일제의 만주 침탈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중국이 일제의 통치를 자발적으로 허용했는지 따지러 온 것이었다. 남자현은 자신의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쓴 뒤 그들이 묵은 호텔로 보냈다. 중국 뿐 아니라 조선의 일제 침탈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라는 요구였다. 안타깝게도 그 뜻은 전달되지 못했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신념을 다한 대한의 여인

 

경북 영양에 세워진 남자현 지사 기념비최후의 투쟁은 1933년 2월 하얼빈의 만주국 일제전권대사 부토 노부유시를 암살하려 한 일이다. 총기를 품은 그녀는 현장에서 조선인의 밀고로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하얼빈 감옥에 투옥된 후 8월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17일의 단식 끝에 빈사 지경에 이르자 일제 경찰은 그녀를 석방해버린다. 조선인 여관에 투숙한 남자현은 남은 혈육인 김성삼을 불러 지니고 있던 돈을 꺼내, 자식을 교육시키는 데 절반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조국이 독립하면 그 축하금으로 쓰라고 맡긴 뒤 눈을 감는다. 이 땅의 미래에 대한 투철한 사유와 확고한 믿음은, 놀랍고도 아름답다. 일제의 탐욕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주체성이 하염없이 무너지던 시절, 여성의 질곡을 벗고 감연히 일어나 스스로의 신념으로 삶과 세상을 개척해갔던 불굴의 대한 여인을, 우리가 100년도 되지 않아 이토록 까맣게 잊어서야 되겠는가.

 

해방 직후만 해도 남자현은 손꼽히는 애국지사였다. 1946년 3월 1일. 정부의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이승만, 김구가 참석한 가운데 남자현이 남긴 독립축하금 전달식이 있었다. 전달자는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영원이었다. 또 그해 8월 22일 서울 인사동 승동예배당에선 옥사한 독립지사 남자현 추념회가 있었다. 독립촉성 애국부인회가 주최한 기념행사였다. 1962년 삼일절, 대통령 윤보선은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2급 훈장인 복장은 홍범도, 이봉창, 신채호, 오세창 등 58명이 받았는데, 그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 남자현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유관순 열사도 받지 못했던 훈장이다.

 

남자현은 식민지의 가장 절망적인 시대를 가장 격렬하게 살아내면서도, 일제의 쇠망과 이 땅의 독립을 예견했던 선각자였다. 고통 속에서도 겨레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자존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이었던 자신을 감추거나 외면한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역량을 적극 발휘하여 이 나라의 미래를 세우는데 충혼을 바쳤다. ‘만주의 여호(女虎)’라는 명성은 두려움을 모르던 그 뜨거웠던 여성의 길을 웅변해주는 아름다운 호칭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