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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평화를 기도하는 땅, 우토로
  • 배지원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공동사무국장)

평화를 기도하는 땅, 우토로제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90년대 초 대학 재학 시절 캠퍼스 어느 강의실에서였습니다. 집단 따돌림과 차별을 견디다 못해 졸업식 날, 학교 옥상에서 몸을 던져 짧고 고통스러운 삶을 끝낸 재일동포 고등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꽤 되었건만 조선인의 후예라는 운명적인 이유만으로 그런 선택에 내몰렸다고 하니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마을 우토로를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도 10여 년이 더 지난 2004년이었습니다. 우연히 켠 라디오에서 고국을 찾은 우토로 동포들의 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후 보상도 없었습니다. 우리를 내쫓으려 하고 마을을 없애려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토로에서 살고 우토로에서 죽을 것입니다!


당시 몸담고 있던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의 한 조선인 마을이 1989년 갑작스레 퇴거 소송을 당한 뒤 15년째 강제 철거에 맞서 싸워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분노케 하기 충분했지만 생존권이 걸린 문제인 만큼 나서는 데에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고심 끝에 저와 동료들은 2005 2월 매서운 교토의 겨울 공기에 몸서리치며 우토로를 찾아갔습니다. 일본 자위대 부대와 일본인 마을에 둘러싸여 직사각형으로 뻗어있는 약 6,400평 크기의 마을에는 당시 65가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과 자위대의 경계에 쌓은 둑 위로 건장한 자위대 청년들이 열을 맞춰 달리고 있었습니다. 총을 어깨에 메고 순찰하듯 둑 위를 오가는 자위대원도 있었습니다. 우토로 동포들은 추운 날씨임에도 한국에서 온 낯선 방문자들을 만나려고 마을회관 ‘에루화’로 삼삼오오 모여들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피식민지의 백성으로 일본을 헤쳐 살아온 이 사람들의 얼굴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철거에 대한 두려움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습니다.


왜 고향을 떠나 일본 땅에 오게 되었는지, 왜 우토로에 살게 되었는지, 한국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동포 개개인에게 물었습니다. 한 어머니는 일본말과 경상도 어투의 우리말을 섞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땅에 계속 살게 해 주이소. 한국 대통령이 일본 수상한테 이야기해서 우리를 쫓가내지 못하게 단단히 말하라고 해 주이소. 우리가 일본 사람이었으면 이런 일 절대 없다 아이가. 잘 부탁하입니더.” 우물 물을 사용하는 세대가 여전히 있는가 하면, 마을에 하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해마다 홍수 피해와 모기떼로 힘들다고도 했습니다. 그래도 마을 한쪽에는 손바닥만 한 고추밭과 배추밭이 일궈져 있었고,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탄 낡은 집 창살 안으로는 ‘우리는 하나’라는 자수 액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우토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교토 군 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약 1,300명이 ‘함바飯場’라고 불리는 집단 합숙소에 살면서 몸에 피멍이 가실 날 없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군수시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 징용과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식솔을 이끌고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탄광에 징용당했다가 우토로까지 흘러온 사람도 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고 싶어 일본까지 건너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고향에 가족도 논밭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 돌아갈 뱃삯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당분간만 일본에 남아 돈을 모아 돌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갸거겨’ 우리말을 가르치며 곧 내 나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으로 우토로에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분간만’이어야 하는 세월이 수십 년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세월 동안 사람들은 우토로라는 일본 사회의 외딴 섬에서 투명 인간처럼 살았습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그곳에는 처절한 빈곤이 있었고, 민족학교가 강제 폐쇄되어 어쩔 수없이 다니게 된 일본 학교에서는 ‘우토로에 사는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조선인들끼리 살을 부대끼며 사는 우토로 안에서는 모두가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2005년 봄 여러 시민단체들과 ‘역사청산! 거주권보장! 우토로국제대책회의’라는 연대체를 꾸렸습니다. 전후 보상 문제와 잘못된 한일 협정의 역사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우토로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호소했습니다. 강제 철거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고심 끝에 다소 황당무계하게도 들릴 수 있는 ‘토지를 사들이자’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토지 매입을 위한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을 펼쳐 시민을 움직이고, 시민의 힘으로 양국 정부를 움직여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분들과 언론이 동참하고 아름다운재단이 결합하였습니다. 우토로 주민들은 ‘이제는 조국이 나서 달라’는 내용의 손편지를 국회와 외교부, 청와대에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7. 6억 원의 모금액을 토지 매입 계약금으로 보내면서 계획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 캠페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수많은 시민과 우토로 살리기 돼지 저금통을 만든 중학생들,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노부부, 그리고 인혁당 사건 피해자 유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모금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의 힘이 우리 정부를 움직였고, 한국 국회에서 30억 원의 지원 예산이 통과하자 일본 정부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국토교통성과 교토부, 우지시는 우토로 마을 정비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비록 우토로 마을 전체를 사들이지는 못했고, 마을정비사업에 따른 가옥 철거로 목숨과도 같은 집을 내주기도 했지만 동포들은 계속해서 이곳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1세들이 떠돌지 않고 우토로의 품에서 눈 감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본 사회 가장 저변에서 식민통치를 겪고 전쟁과 차별, 빈곤을 이겨온 우토로 재일조선인들. 우토로 거주자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를 취소당하고, 야쿠자로 오해받고, 급기야는 삶의 터전이 철거 직전에까지 내몰렸지만 그들은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지켜냈습니다. 이제 그 역사적 가치와 정신을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다시 한일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역사 보전과 마을회관으로 사용될 아담한 건물을 짓고 허물어질 것만 같은 오래된 ‘함바’도 복원할 계획입니다. 우토로 동포들은 ‘평화를 기도하는 땅’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 건물을 ‘우토로 평화기념관平和祈念館’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독 박물관으로서는 일본 땅에서 첫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곳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고, 함께 하는 한일 시민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소중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 운동에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평화를 기도하는 땅, 우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