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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장제스
  • 배경한(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윤봉길 의거와 임시정부 이동 시기의 김구와 장제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김구는 임시정부 출발 단계에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이후에 가서는 내무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며 1926년 말에 가서는 국무령이 되었지만 그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부상한 것은, 1932년 4월 29일 일어난 윤봉길 의거 이후였다. 이런 사정은 1928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의 최고 군사 정치 지도자였던 장제스(蔣介石)의 언급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장제스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윤봉길 의거 다음날인 1932년 4월 30일자 일기에서 장제스는 신문보도를 통하여 윤봉길 의거를 접했다고 하면서 한인(韓人) 윤봉길과 함께 안창호를 주모자로 거론하고 있었던 것이니 적어도 이 단계까지 장제스가 김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히는 것이다.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上海)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수사와 압박이 날로 심해지자 김구는 중국의 여러 신문사에 성명서 형식의 편지를 보내 이번 의거가 자신의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게 된다. 5월 10일자 중국의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의 진상(虹口公園炸彈事件眞相)”이라는 이 성명서에서 김구는 윤봉길과 자신의 약력, 의거의 경과와 목적 등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도 장제스는 이 단계부터 윤봉길 의거의 배후에 김구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중국국민당 계통의 조직을 통하여 김구의 도피 와 신변 안전을 위한 ‘지원’에 나섰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1932년 7월 초에 국민당 조직부 요원 샤오징(蕭靜)의 휘하였던 공페이청(貢沛誠)이 장제스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김구가 자신에게 무기소총를 지원해준다면 동북지역에서 한인독립군을 조직하여 중국 의용대와 협력, 공동 항일작전을 전개할 수 있다고 하니 지원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들어 있다.


김구가 장제스를 직접 만난 것은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1년 정도가 지난 1933년 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南京)에 있던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장 관사에서였다. 장제스나 중국 측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백범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요 멤버이면서 동시에 국민당 당원으로 중앙당부에서 일한 적도 있던 박찬익의 주선에 의하여 장제스를 만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1932년 1월에서 4월에 걸친 제1차 상하이사변을 겪은 다음 일본과의 전면전을 예상하고 장기적인 항전 전략을 세우고 있었고 그 주요 내용 가운데 중국 내 한인독립운동 세력의 동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당시 김구와의 면담이 장제스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장제스와의 첫 면담에서 김구는, 장제스가 자신에게 100만 위엔(元)을 지원하면 2년 내에 일본, 조선, 만주 지역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와 같은) ‘특무공작’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하면서 보 다 장기적인 전략으로서 무인(武人)의 양성, 곧 한인 군관의 양성을 권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면담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34년 2월, 뤄양(洛陽)에 있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 안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이었다. 이 뤄양 분교 한인특별반을 통해서 양성된 한인 군관들은, 장제스가 지원한 또 다른 한인 독립운동 세력, 곧 김원봉을 중심으로 난징 근교에 만들어졌던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를 통해 양성된 한인군관들과 함께 뒷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근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국민 정부 측의 ‘지원’은 중국 내 한인독립운동의 존립과 발전에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을 만큼 한국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장제스의 ‘지원’은,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러한 ‘지원’의 내면에 중국 측의 이해관계를 앞세운 ‘동원’과 ‘통제’로서의 측면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1933년부터 시작된 장제스의 김원봉과 김구에 대한 ‘지원’의 배경에는 한인군관 양성을 통하여 이미 일본의 점령 아래 들어간 동북 지역에서의 항일의용대 지원에 ‘동원’하려는 계획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봉길 의거 이후 1940년 충칭(重慶)에 도착하기 전까지 8년간을 중국의 곳곳을 떠돌아야 했던 임시정부에게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지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윤봉길 의거 직후부터 일제는 한인 독립운동 세력 내의 알력과 불만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김구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은 최근 새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도 1937년 5월 창샤(長沙)에서 발생한 이른바 남목청(楠木廳)사건은 일제가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친일분자 박창세를 포섭하여 김구에 대한 불만분자 이운환을 사주함으로써 김구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이 때 김구는 심각한 총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우한(武漢)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는 여러 차례 김구의 안위를 묻는 전보를 보내고 나중에는 자신의 측근을 김구에게 보내 위문의 뜻을 전하였으며 상당액의 치료비도 보내주었던 것이니 그만큼 장제스와 중국 측의 ‘지원’은 임시정부의 존립과 김구의 생존에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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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의 창설과 김구, 장제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대로 이러한 ‘지원’의 뒷면에는 ‘동원’과 ‘통제’라는 측면 또한 엄연하게 존재하였으니 그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은 1940년 9월 충칭에서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의 창설 및 운영과 관련해서이다. 충칭으로 옮겨온 이후 김구와 한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창설에 매진한 것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여 항일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종전 이후 있게 될 강화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임시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종전 이후 임시정부의 국제적 발언권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국제적 승인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로서는 독자적 군사력 확보에 더욱 진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복군 창설 이전에 김구는 여러 차례 장제스에게 허가 비준를 요청했지만 차일피일 늦어지자 1940년 9월 17일 충칭 쟈링(嘉陵) 강변의 한 호텔에서 정식 허가 없이 성립 대회를 치르게 된다. 이 성립대회 식장에 장제스는 참석치 않았지만 순커(孫科), 위요런(于右任), 우티에청(吳鐵城) 등 국민정부 요인들과 허잉친(何應欽), 펑위샹(馮玉祥), 바이충시(白崇禧) 등 중국군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실상의 허가를 얻은 셈이 되긴 했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은 창설과 함께 중국 측의 강력한 ‘통제’ 아래 묶이게 되었으니 1941년 11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제정한 이른바 “한국광복군행동구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은 한국광복군의 지휘권과 운영권을 중국 군이 독점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는 여러 차례 이 구개준승의 폐지를 요청하였으나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입장은요지부동이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이러한 ‘통제’ 입장은 자국 내 외국 군대의 창설과 운영을 용인하기 어렵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 많은 한인 독립지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해온 이후 ‘한중호조(韓中互助)’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중국의 혁명과 항일에 참여하는 일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삼았던 많은 한인들이 중국혁명과 항일전쟁 가운데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굴욕적’인 조치였다. 종전을 앞둔 시점인 1945년 4월, 구개준승이 폐지되어 한국광복군은 비로소 임시정부에 소속되었으나 이것 또한 종전 이후 한반도에서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친중 정부 수립을 희망하는 장제스 측의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이로회담과 김구, 장제스

이차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연합국 간의 군사적 협력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1943년 11월 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 한 합의가 4대 열강들(소련은 12월 초에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내용 추인)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4대 강국의 일원으로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루즈벨트와의 단독 면담에서 전후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는데 일정 기간 한다는 루즈벨트의 주장에 밀려 ‘적당한 시기를 거쳐’라는 전제조건이 달린 채 전후 한국의 독립이 선언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흔히 말하듯이 전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첫 번째 결실이 장제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장제스의 ‘지원’은 의미가 크다고 알려져 왔다.


또 장제스가 카이로회담을 준비하고 있던 1943년 7월, 장제스를 직접 면담한 김구가 앞으로 열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다루어지도록 노력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런 점에서 장제스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한 것은 김구의 부탁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받게 된 것이 김구의 공로라는 주장도 그간에 적지 않게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의 준비과정을 자세하게 검토해본다면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김구의 부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장제스는 철저하게 중국의 이해관계 위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전후 한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라는 중국 측의 목표 아래 “즉각적인 한국 독립”을 루즈벨트에게 제기했던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 패망과 환국 전후시기의 김구와 장제스

1945년 8월 10일, 시안(西安)에서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김구는 기쁨에 앞서 깊은 탄식에 빠졌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종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임시정부가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독자적 군사력을 통한 참전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 조건들을 미처 충족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8월 18일 충칭으로 돌아온 김구는 곧바로 국민당 중앙비서처 비서장 우티에청(吳鐵城)을 면담하고 조속한 환국을 위한 협조를 중국측에 요청하였다. 이 면담에서 우티에청은 김구에게, 미군과 중국군이 남한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할 예정이고 이들 점령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군정이 실시된 다음 독립정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한반도 진주는 중국 측의 일방적 희망사항이었으니 이보다 앞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이 합의,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 요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친중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전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보라는 중국 측의 희망은 이루어 지기 어려운 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측은 미국과의 협조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책으로서 중국 돈 1억 위엔元과 미화 20만 불에 달하는 거액의 특별지원금을 지급하였다. 중국 측과 미국 측 사이의 지루한 협상 끝에 임시정부의 명의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의 귀국이라는 조건 아래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이 ‘허가’된 것은 일본의 항복 선언이 나온 지 2달여 뒤인 10월 하순에 가서였다. 10월 24일, 충칭에서 중국국민당이 주최한 공식환송회가 열렸으며 29일 따로 장제스를 방문한 김구는 그간에 중국 측이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특별히 환국을 위한 경비를 지원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였다.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일진 15명이 미군 측이 마련한 수송기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김포에 도착하였다. 이날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소식은 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었으니 이 날의 쓸쓸한 분위기는 김구와 임시정부의 국내에서의 활동이 험난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해주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미국이 주도하는 해방정국 속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세력은 정치적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으니 이로써 중국의 친중 정부 수립 희망은 물거품 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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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환국 이후의 김구, 장제스

한반도의 상황 변화와 함께 1946년 이후 중국에서의 상 황도 장제스의 희망을 실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1946년 4월 이후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의 전면적인 내전(국공내전)이 발발하여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전 초기에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던 국민당군은 내전 발발 이듬해인 1947년 말을 전환점으로 하여 공산당에게 우세를 내주고 퇴각을 거듭하였다. 결정적으로는 1949년 1월 베이핑(北平, 곧 베이징)과 톈진(天津)이 공산당군에게 무혈점령되었고 4월 말에는 수도인 난징이 공산당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구에 대한 지원이나 한반도에 친중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노력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1948년 7월 하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1월 초 중화민국 정부는 남한정부를 정식 승인하였다. 그에 앞서 1947년 4월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길에 난징에 들린 이승만을 만났던 장제스는, 김구의 환국 길에 제공했던 20만 달러의 지원금을 자신에게 달라는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로써 장제스는 김구에 대한 지지 입장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이승만과는 어색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1949년 6월 말 김구가 암살당하자 중국 측에서는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지만 공산당군의 공세 속에 위기에 몰려 있던 국민당 정부의 형편으로는 더 이상의 입장 표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