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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가해의 역사와 화해의 역사의 교차점을 찾아가다
  • 이병택(재단 국제관계와 역사대화연구소 연구위원)

필자는 4월 17일부터 20일까지 재단의 ‘역사 화해 사례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재단 공동연구위원 3인과 한·일 과거사 관련 유적지가 위치한 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을 답사했다. 일본의 시민단체 회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역사 화해의 실마리를 찾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를 중심으로 답사를 계획한 이유는이곳이 역사의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가나자와시는 ‘극우적’인 애국심이 표출되는 곳이면서도, 같은 도시 내에 화해의 몸짓이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나자와시가 일본의 복합적인 모습을 집약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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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시발점은 가나자와성이었다. 근대화 과정에 대한 일본인의 복잡한 심리를 읽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나자와성으로 걸어가던 중 처음 마주한 것은 교육의 상징 제4고등중학교 옛 본관 건물이었다. 근대화의 자랑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가나자와성이 겪은 근대화의 내막은 아이러니한 느낌이었다. 가나자와성은 메이지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때까지 군부대(1875년 육군 7연대, 1898년 육군 9사단 사령부)를 설치했다가, 패망 이후 1949년에는 가나자와대학 캠퍼스가 되었다. 그리고 1995년, 가나자와대학을 외곽으로 이전하고 2001년 성을 복원해 가나자와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가나자와 공원 내에 여전히 군부대의 무기고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군대’를 ‘대학’으로 그리고 또다시 근대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면서 군부대의 유물인 무기고를 그대로 둔 것은 가나자와가 가진 역사의식의 복잡성과 기묘한 굴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나자와성의 맞은편에 위치한 겐로쿠엔(兼六園)은 광활, 고요, 기교, 고색창연, 호수와 수로(水泉), 조망의 요소를 아우르는 정원이다. 이곳에 일본무존(日本武尊) 동상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세이난 전쟁(메이지 1866년)에서 전사한 향토출신의 장병을 추도하는 비(1880년 건립)도 1992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이 두 기념물은 겐로쿠엔의 특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겐로쿠엔을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호국신사, 이곳에 일본의 자의적 우월성을 대변하는 기념물인 대동아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가 있었다. ‘대동아’, ‘성전’ 그리고 ‘대비’라는 단어에서 묻어나는 과대우월의식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용어들 속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전쟁의 목적을 애써 항변하는 불안한 심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어느 나라든 참전 군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애국을 정려한다. 그러나 근대 일본이 저지른 전쟁은 목적과 수단 면에서 일본인 스스로에게도 큰 공감과 울림을 갖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 대비의 과장된 모습에서 일본 근대의 불안정성 내지는 불완전성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외부 세계와 화해하려는 몸짓들도 엿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7개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을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주시가 가나자와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이시카와 현립박물관에는 전주시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근대사를 조금 더 호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열강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으며 세계의 일원이되고자 했던 바람이 일본인의 마음 한구석에 존재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에 방점을 둔다면 이 같은 화해의 몸짓을 통해 일본을 좀 더 바깥 세계로 끌어내고 개방의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시카와현의 추모 묘원에는 일본의 군인들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 군인들의 추모비까지 세워져 있다. 적과 아를 구별하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진혼의 관념을 가지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곳에서 우리는 윤봉길 의사의 암매장지와 추모비를 찾아갔다. 윤봉길 의사는 처형 후 묘원으로 들어서는 비스듬한 통행로에 암매장되었다고 했다. 그 장소는 헌병대 관리실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 늘 감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암매장지에서 묵념을 마치고 그곳으로부터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추모비를 찾았다. 봄볕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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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교포와 일본인을 엮어내는 역할뿐아니라 재일교포를 아우르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를 매개로 평화시민운동을 하는 일본인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들의 대다수는 60년대 후반 대학에서 반전평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로, 그 경험에 힘입어 지금까지 그 길을 진지하게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제 이들의 나이는 칠순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이들의 뜻을 이어나갈 세대가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경험을 일반화하고 공유하지 않는다면 특정한 시대의 경험은 역사적 디아스포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역사적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재일동포의 삶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받았던 고통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발생한 동포 내부의 균열, 그리고 젊은 세대들의 정체성 문제 등이 녹아 있다. 특히 일본의 동화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신세대 재일동포들 사이에는 일본으로 귀화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우리는 가나자와 한인들의 집단적 거주와 해방 이후의 거주지 이주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김종근 박사가 일제시대 가나자와의 지도에서 한인의 거주지를 확인해 주자, 자연스럽게 그 당시 조선인들의 삶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당시 조선인 거주지에는 개별 주소가 없고 단일 주소가 주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하천의 범람으로 집들이 쓸려 갈 경우, 일본 관리가 근무하지 않는 일요일을 틈타 재빨리 다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집이 완성되면 일본 관리는 그 집을 철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동포사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 발굴과 추모 운동이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유해 발굴의 과정과 추모 운동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일본인들도 이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등의 화제가 이어졌다. 마지막 날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답사를 끝으로 유적지 답사는 끝났다. 답사가 이뤄지는 내내 역사 화해와 관련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