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나이,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전 계층이 참여한 이 운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었다. 올해 새 연재코너 <다시 보는 3·1운동>에서는 100년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3·1운동 가운데 많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국제질서의 재편, 1차 세계대전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세계 질서 변화에 우리 민족 스스로가 독립을 위해 능동적으로 호응한 결과다. 당시 세계 질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이다. 1914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독일 간의 강화조약이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되며 종전하였다.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국제 질서 복구를 지향하고 있었다. 프랑스 총리이자, 파리 강화 협상 회의 전권대사였던 클레망소는 파리 강화 협상 회의 개회를 1월 18일로 주장했다. 1월 18일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독일제국이 출범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게 세계 질서의 복구는 보불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복구는 독일의 복수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이에 대비해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전후 불안은 비단 프랑스와 독일만의 상황이 아니고, 전체의 상황이었다.
제국의 붕괴와 민족해방운동
1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제국의 붕괴였다. 독일 제국을 비롯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전쟁 중 혹은 직후 붕괴됐다. 제국 붕괴 이후 이들이 지배하던 지역에는 주로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 수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동맹국 뿐만 아니라 영국 등 연합국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영국 등 연합국은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였고, 이는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 약화로 이어졌다. 열강의 약화는 지배 지역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나라가 아일랜드다. 영국에서 분리 독립을 모색하던 아일랜드는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무장저항을 이어갔고, 1919년 1월 19일 독립을 선포했다. 이런 상황은 유럽에 국한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보호국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로 이어지는 도로를 공격, 장악하고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보호국화한 이집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열강의 영향력 약화는 세계 각지에서 저항으로 이어졌고, 일부는 국가를 수립했다.
특히 제국이 붕괴된 지역은 민족중심의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지배를 받던 에스토니아는 1919년 2월 24일 독립했고, 헝가리 역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분리 독립했다. 이때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와 바이에른 지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공산 혁명 확산은 유럽의불안을 증폭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는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한다.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은1918년 체코군 구출을 명분으로 러시아에 군대를 파병해 주로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하였고, 러시아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러시아 내전은 동북아시아까지 영향을 주었다.
일본과 중국은 세계 대 전 중 독일 등 동맹군이 침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 협정을 체결한다. 중국은 군사협정을 근거로 연합국측에서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일본으로부터 군사차관을 받아 군대를 창설했다. 이를 두고 중국 내 군벌 간의 헤게모니 다툼은 내전으로 격화된다.
국제 정세의 변동과 독립운동
미국은 1917년 초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종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파리 강화 협상 회의 개최 이전부터 그 징후가 보였다. 윌슨은 집단 안보와 민족 자결 등을 통해 유럽 질서를 재편하고, 이를 통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구상했다. 이를 위해 윌슨은 강화 원칙으로 ‘14개조’를 주장했지만, 전후 유럽 열강은 자국 안정과 피해 복구를 통해 질서를 회복할 수 있으며 윌슨의 ‘14개조’ 역시 전쟁 중 연합국 간 약속과 함께 이행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미국 내 정치적 상황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윌슨이 대외정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미국 의회의 지지가 필요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 상원의 비준이 필요했고, 하원의 예산안 처리가 필요했다. 당시 공화당은 윌슨의 정책을 반대하였는데, 1918년 11월 5일 미국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서 윌슨의 정책은 제동이 걸렸다. 이런 미국의 정치지형 변화는 윌슨의 대외 정책이 미국 의회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면서 윌슨의 정책은 미국 내 지지 기반과 추동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윌슨의 구상은 열강 간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로 한정되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은 자국안보를 명분으로 동맹국을 분할해 국경선을 재조정했다. 제국이 붕괴된 지역은 지역 분쟁이 심화돼 유럽 정세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공산혁명이 확산하면서, 이에 대한 위기의식이 유럽 각국에 퍼졌다. 미국 역시 유럽 위기의식에 배타적 법안을 통과시켰고, 일본은 이런 국제정세와 위기의식을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이러한 세계 질서의 변화는 3·1운동이 발화해 확산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