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근대국가 몽골과 국교를 수립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몽골인민공화국은 1921년 아시아 최초의 공산국가로서 근대 역사를 시작한다. 70년 후 탈소(脫蘇) 개방화의 바람 속에서 1990년 러시아 영향 하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 몽골국이 성립되면서, 1990년 한국과도 국교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몽골과 우리의 직접적 외교 관계의 성립은 800년 전인 12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19년 고려와 몽골은 맹약을 맺어 최초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이것은 이후 여몽관계의 출발점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1219년 여몽 맹약의 성립 과정
몽골군이 처음 고려와 공식적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칭기즈칸 시대인 1218, 9년(고종 5, 6)이다. 1216년 8월 금 치하에 있던 거란족의 고려 침입이 그 계기를 만들었다. 거란족들은 1218년 고려에 침입했고, 이때 동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몽골군이 동진군을 이끌고 거란을 몰아내준다는 명분으로 고려에 입경한 것이다. 몽골군은 동북 국경 지역인 화주, 맹주, 순주, 덕주를 공파하고 거란족을 추격해 12월 평양의 동북쪽에 위치한 강동성(평남 강동군)에 이른다. 1만의 몽골군에 동진의 군 2만이 합세한 대규모였다. 이들은 고려군과 연합 작전을 벌여 거란군을 제압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강동성 전투’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1219년(고종 6) 1월, 현장의 고려-몽골 양측 군사 지휘부는 ‘맹약’이라는 이름의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향후 반전(反轉)을 거듭하게 되는 다사다난한 여몽관계의 출발점이다. 당시의 맹약은 지배와 복속 개념이 아니라 수평관계로서 성립된 것이었다.
1219년 강동성 전투 이후 이루어진 여몽간의 화의 체결은 몽골군의 적극적 요구에 의해 실현된다. 몽골의 원수 카진(哈眞)·쟈라(札剌) 등은 강동성 전투 직전 고려 원수부에 보낸 편지에서, 적을 격파한 다음에 고려와 형제 맹약을 맺도록 하라는 칭기즈칸의 명이 있었음을 통보하고 있다. 이것은 몽골이 거란족을 진압한 이후 고려와 화의 관계를 체결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에 대한 몽골 측의 적극적 맹약 체결 요구는 거란족에 대한 공동 작전을 계기로 고려를 그 영향력 하에 묶어두려는 전략적 필요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고려의 입장에는 몽골의 이 같은 요구를 거절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몽골의 압박이 현실화된 시점에서 고려는 단절되었던 금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해 이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이미 금은 이러한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고려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강동성 전투를 계기로 여몽 간에 이루어진 1219년의 ‘맹약’은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한 몽골에 맞서 불필요한 마찰을 원하지 않았던 고려의 입장, 그리고 금의 공략에 맞서 배후 안전판을 구축하려는 몽골의 전략적 의도에 의해 성립되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여몽 맹약의 내용과 추이
당시 ‘맹약’은 몽골에 대한 정기적 세공(歲貢) 납부가 협정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협정이었다. 어떤 이는 이미 당시에 고려 국왕의 몽골 입조가 전제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추측이라 생각한다. 또한 1218년 카진(哈眞) 등 몽골군의 고려 입경을 사실상의 ‘침입’으로 간주해 이를 ‘몽골의 제1차 침입’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러한 견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고려 침입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강동성 이후 고려가 몽골과의 화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가까이하기를 꺼렸다”고 이야기할 만큼 몽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함께하기 거북한 상대’였다.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과 초기 단계의 외교가 성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몽골에 대한 불신감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정부는 이들과의 친교에 대해 기본적으로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맹약’ 체결에 대해 정부로부터 그 어떤 회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몽골군의 재촉 때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강동성 전투 이후 맹약 체결에 따라 그해 1219년 9월부터 1225년(고종 12)까지 몽골은 매년 고려에서 공물을 거둬 갔다. 몽골에서 거둬가는 세공은 고려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세공사 저고여가 요구한 물품은 수달피 1만 령, 비단(細紬) 3천 필, 먹(용단묵) 1천 정, 종이(紙) 10만 장을 비롯해 다량의 각종 물품들이었다. 과도한 공물 징구 때문에 “매양 명을 내려 한없이 요구하니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며, 몽골 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심지어 몽골은 고려에서 생산도 되지 않는 물건과, 젊은 여성 혹은 각종 기술자까지도 요구해 왔다.
햇수로 7년 동안 지속된 이러한 관계는 1225년(고종 12)세공사로 고려에 들어온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는 사건으로 인해 파탄에 직면하게 된다. 저고여는 고려에서 공물을 거두어 돌아가던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피살되었다.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몽골 측 사신조차 화살 세례를 받고 쫓겨나고 말았다. 고려는 이 사건이 근처 도적들의 소행, 혹은 고려군으로 위장한 동진군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몽골은 이를 전적으로 고려 측 책임으로 단정지었다.
저고여의 피살 사건으로 여몽 간의 ‘맹약’ 관계는 파탄이 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231년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쳐들어온다. 침입을 개시한 몽골군의 명분은 6년 전 저고여 피살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이었다.
‘여몽 맹약’을 활용한 고려의 외교
1219년의 여몽 맹약은 원 간섭기에 몽골의 무리한 요구를 완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231년 이후 고려는 40년 세월의 긴 항전 끝에 몽골원에 복속되었는데, 이른바 ‘원 간섭기’라는 정치적 상황으로 전환되자 1219년의 ‘맹약’이 여원관계의 출발이었다는 점을 새삼 주목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것이 칭기즈칸의 지침에 의해, 그리고 우호적 분위기에서 약조된 것이었음이 강조된 것이다. <고려사> 김취려전에서는 카진(哈眞), 쟈라(札剌)가 고려의 조충, 김취려 등과 형 동생을 서로 삼고 주석(酒席)을 같이하면서 “양국이 영원히 형제가 되어 만대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맹약을 잊지 말자”라고 하였다는 다짐이 장황하게 설명되고 있다.
원 간섭기의 고려는 원과의 끊임없는 외교적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1219년 여몽 간의 ‘맹약’을 확인하는 것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원의 무리한 압박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몽골의 본격적 침략 이전 단계에 맺어진 이 ‘맹약’의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원 간섭기 상황에서 1219년 여몽 간에 맺은 ‘맹약’의 외교적 유효성을 명확히 인식한 인물은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입성론(立省論)’이 비등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논리로서 1219년 여몽 간의 ‘맹약’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을 수송할 수 없게 되자 우리 임금이 조충과 김취려를 시켜 식량과 무기를 보급하고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미친 듯이 날뛰던 적을 대나무를 쪼개듯 무찔렀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을 맹서하였던 것입니다.” 이제현은 고려와 원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우호적 관계를 체결한 특별한 관계의 나라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1260년, 즉위 이전의 원종(태자 전)이 몽골에 입조했다가 즉위 이전의 쿠빌라이를 찾아 인사한 것, 이후 일본 정벌, 카단(哈丹) 침입 시 원군과의 공동 작전을 펼친 것을 언급하면서 일부에서 제기하는 입성론(立省論)이 세조쿠빌라이가 천명한 기준과 근본적으로 어긋난다고 공박하는 것이다.
1219년 ‘맹약’은 원 간섭기에, 원의 고려에 대한 지나친 압력을 견제하는 역사적 전거(典據)로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맹약’ 체결의 당사자인 조충, 김취려의 ‘업적’이 원 간섭기에 높게 평가를 받은 것은 이 같은 고려의 외교적 환경 변화에 따른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원의 무종(武宗)도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나라는 오직 삼한(고려) 뿐”이라 말하며 1219년 몽골과의 ‘맹약’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과 상처가 남겨진 제주
한몽관계 8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역사적 흔적과 상처를 가장 많은 남긴 지역은 영토의 가장 남쪽 끝 제주도이다. 몽골 전쟁 끝에 삼별초가 봉기해 1271년 제주도를 항몽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삼별초는 1273년 4월 군선 160척, 1만 2천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삼별초의 패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1273년 삼별초의 패망 이후 탐라에 대한 지배권이 몽골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몽골은 탐라국초토사라는 관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탐라국초토사는 충렬왕 원년(1275)에 탐라총관부로 개편하고 다루가치를 보내 그 지배를 강화한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1305년(충렬왕 31)까지 몽골에 의해 직접 지배되었다. 이 기간 제주도는 원의 목마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사람들에 의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충렬왕 때에 제주도에 제주목 이외에 14개 현이 새로 설치된 것은 이 같은 제주도의 인구 증가를 반영하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를 본관으로 하는 다수의 성씨가 언급되어 있다.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씨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몽골 지배기가 제주 사회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애월읍의 항파두성 이외에도 서귀포의 법화사, 혹은 원 순제 피난궁전지 등은 널리 알려진 한몽관계의 대표적 유적이다. 몽골과 제주의 특별한 역사는 향후 한몽관계의 역사를 견인할 지역 거점으로서 제주도의 특별한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21세기의 한국과 몽골
800년 전 몽골과 고려가 맺은 ‘형제맹약’은 이름 그대로의 ‘형제’ 같은 우호 관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상호 간의 필요에 의한 전략적 협정의 성격이 짙었으며, 상황과 필요에 의해 몇 차례의 반전 과정을 겪어야 했다. 실제로 국가 간의 외교는 감성보다는 현실적 상황과 필요에 의해 전개된다. 1219년 여몽 간의 맹약 체결도 이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라 할 수 있다.
21세기의 동북아 세계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냉전 체제의 유산이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잠복된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어느 때보다 평화와 공동 번영의 시스템 구축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여기에 동북아의 세력 균형 확보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이점에 있어서 동북아의 일원인 몽골공화국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90년 한국과 몽골 수교 이후 1999년 양국은 ‘21세기 상호 보완적 협력관계’를 형성했으며, 2006년에는 ‘선린 우호 협력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다. 한국과 몽골의 관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단계인 것이다. 3백만 몽골공화국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 인구가 4만 7천에 이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양국은 특별한 관계에 들어섰다. 2019년 ‘형제맹약 800년’은 21세기 한몽 관계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가는 기회로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형제맹약 800년’에 대한 우리 시대의 미래 지향적 대응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