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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3·1운동의 현대적 계승과 국제질서” 제주포럼 재단세션
  • 최운도(재단 국제관계와역사대화연구소 연구위원)

연구소 소식



올해로 14회를 맞는 제주포럼은 “아시아, 탄력 회복적 평화를 향하여”를 대주제로 삼았다. 재단은 제주포럼의 공동집행기관으로서 매년 역사화해 관련 세션을 구성해 왔다. 올해는 포럼의 대주제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고려해 ‘3·1운동의 현대적 계승과 국제질서’라는 제목으로 세션을 구성했다. 3·1운동의 배경이 된 파리강화회의의 의제 중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탈식민주의 등을 공통의 화제로 삼은 것이다. 90분간 진행된 회의에는 김도형 재단 이사장을 좌장으로 4명이 발표하고 1명이 토론을 맡았다. 이는 발표와 토론 질의에 대한 답변을 간추린 것으로 발표자 4명의 시각을 소개한다.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와 3·1운동의 ‘지향점(fight for)’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서울대학교의 박명규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3·1운동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해 왔다면서 독일의 사학자 라인하트 코젤렉이 제시한 ‘지나간 미래(past future)’라는 개념을 들어 3·1운동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이미 지나갔지만, 사건 속에서 미래 지향적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100년 전 3·1운동에서 지향했던 미래를 통해 ‘지나간 미래’에 부합하는 지향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3·1운동을 외세의 지배에 대한 저항(fight against)의 의미뿐 아니라, 지향점(fight for)을 추구한 것으로 본다. ‘fight for’의 측면에서 보다 중심에 있었던 것은 자결과 자주의 권리에 있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점은 평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주권자로서의 인민을 인식하여 왕조체제로부터 인민 주권으로의 전환을 명시한다. 임시정부의 헌법적 체제 원리는 현재 우리 헌법에도 그대로 녹아 있는 현대적 원리이며, 운동의 목표는 독립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저변에 두고 있다. 그래서 3·1운동을 재조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를 선양하는 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비전에 담겨 있던 인간의 해방과 국가수립 그리고 평화로운 국제 질서의 창출을 현재에도 이어나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동상이몽의 국제사회와 민족자결주의

재단의 신효승 연구위원은 파리강화회의와 당시 국제질서의 상황을 설명했다. 파리강화회의는 그 명목과는 달리 각 국가들은 유럽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스는 1871년 보불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고자 함을 상징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그 장소로 삼았다. 그러나 현실은 국제질서가 일국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3·1운동과 5·4운동 등은 이러한 세계 질서의 변화 양상을 확인케 한다. 세계 각지의 열강 영향력 약화는 무장저항과 독립혁명으로 이어졌고, 일부는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문제는 민족이라는 공동체와 이로 인한 갈등의 확산이었다. 여기에 민족자결주의를 강화원칙으로 제시한 미국이 세계대전 이후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갈등은 증폭되었다. 윌슨의 정책은 미국 내 지지 기반과 추동력을 상실하게 했고, 윌슨이 강화원칙으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역시 그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윌슨의 강화원칙은 열강 간의 이해가 상호 충돌하지 않는 범위로 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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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 ‘거기까지’의 동화(同化)정책

와세다 대학의 아사노 토요미(浅野豊美) 교수는 오늘날 동북아 특히, 한일 역사인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사적 관점이 아니라 세계사적 측면에서 국민 상호 간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감정질서’를 형성하는 연결 고리를 모색할 것을 촉구하며 3·1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1차 세계대전은 주권 국가를 일부 열강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이전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었고, 이를 대신해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하에서 3·1운동 직후 일본 신문들은 그 원인을 조선인 자신들의 문제와 선교사의 선동 그리고 민족자결주의 사상의 전파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점차 일본의 지배 형태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논조가 변했다. 이런 반성은 당시 일본의 ‘데모크라시’와 결합해 헌정회의 카토 타카아키와 도쿄 제국 대학에서 정치사를 담당하던 요시노 사쿠조 등은 조선에 자치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1919년 4월 이후 신문에서도 무단통치의 개혁과 식민지 의회 설치 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당시 일본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였다. 문화 통치는 언론의 자유를 일부 허용했지만 정치 참여가 제도적으로 허용되기 이전의 전시체제로 대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일본의 구상대로 종전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회적 융합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했던 것이다.



3·1운동, 홍콩, 그리고 5·4운동

홍콩 슈에안 대학의 어우치킨(區志堅) 교수는 홍콩에서 3·1운동은 언론 보도의 제한으로 인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 일본은 독일을 대신해 중국의 칭다오와 산둥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이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홍콩이 비교적 보수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중국의 5·4운동에 집중하였다는 점도 홍콩인들의 3·1운동에 대한 낮은 관심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 호법 정부(護法政府)의 쑨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참전보다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정 국가에 편중하지 않는 '문호개방'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민족주의의 목표는 불평등 조약들을 폐지하는 데 있었다. 자유주의자 후스와 보수주의자 캉유웨이와 같은 지식인들은 파리강화회의가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1919년 5월 3일, 베이징, 산둥, 상하이 중국인은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 시위대의 슬로건은 대외적으로는 주권을 위해 싸우고, 대내적으로는 국가 반역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1919년 5월 4일 오후 2시, 약 3,000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 앞에 모여 분노를 표시했다. 마오쩌둥은 한국과 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자결주의의 제한적 적용과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불만은 중국에 혁명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촉진시켰다. 한편 애국적 민족주의 운동은 중국의 상황이 권위주의적인 권력체제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성에 이르게 했고, 결국은 유교를 배척하기에 이르면서 그 흐름이 5·4운동으로 변모했다.


발표와 토론,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에 이어 김도형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세션을 마무리 지었다. “오늘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각국의 상이한 역사적 경험에 대해 그 차별성을 강조하기보다 서로 이해하고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