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109년 전에 시작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하에서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 카(E. H. Carr)가 설파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며, 토인비(A. J. Toynbee)가 주창한 ‘도전과 응전’으로서의 역사적 성찰을 통한 응답으로, 역사정의의 차원에서 조명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반성으로 탄생한 국제인권법
역사적인 맥락에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은 전체주의 국가들이 도발한 인류역사상 가장 큰 참화라 할 것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3국 군사동맹인 추축국(Axis Powers)과 영국·프랑스·미국·소련·중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Allied Powers)의 대립으로 진행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세계의 전반적 위기가 초래한 1929∼33년의 세계 대공황은 자본주의 제국의 불균등한 발전으로 인해 기초적인 펀더멘털이 취약한 독일·이탈리아·일본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되자 일거에 위기 국면 타개를 위한 침략전쟁으로 도발함으로써 첨예한 세계대전으로 전화되었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 기간 5,000만명이 희생된 전대미문의 참화는 전범으로서 추축국인 이탈리아의 파시즘(Fascism), 독일의 나치즘(Nazism), 일본의 군국주의(Militarism)로 통칭되는 전체주의를 사상적 기조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강력한 국가주의의 폐해가 잉태한 참혹한 결과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낳은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오늘날 국제사회 인권의 보루인 국제인권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본과 독일의 침략과 잔학행위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극단적인 경시를 기초로 하는 사악한 전체주의 철학의 결과였다는 점에 대한 인식과 반성으로부터 형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설립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1945년 10월 24일 출범한 국제연합(UN)은 국제사회의 평화공동체를 향한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로서의 전쟁 방지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서의 인권 보호를 회원국의 의무로 헌장에 규정함으로써 국제인권법의 발전을 견인해 왔다. 이러한 국제인권법의 발전을 3단계로 구분하면 첫째, 국제인권법 규범의 정립 단계. 둘째, 국제인권기관의 설립 단계. 셋째, 국제인권법 집행제도의 확립 단계로, 각 단계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 국제인권법 규범 정립 단계(1945~1966)년에서는 UN헌장 제1조, 제55조, 제56조 등에 인권 보호를 규정하고, 1948년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1966년 2개의 UN인권규약 및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협약을 채택하였다. 제2단계 국제인권기관 설립 단계(1966~1989)년에서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의 발효로 UN인권위원회와 인종차별철폐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제3단계 국제인권법 집행제도 확립 단계(1989년 이후)에서는 냉전종식 이후 인권 관련 규칙의 준수와 효율적 집행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나가고 있다.
국제인권법의 발전과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의 채택
특히 국제인권법의 발전과 관련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은 2005년 12월 16일 UN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피해자권리 기본원칙』이다.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은 1980년대부터 축적되어온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국제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결실로서, 주요 국제인권조약에 규범적 근거를 가진 ‘실효성 있는 구제에 대한 피해자의 권리’와 관련된 법리의 발전을 반영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이 원칙은 자체로는 연성규범(soft law)이나, 이미 인정된 인권침해 피해자의 권리와 이를 존중하고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에 대한 원칙과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권리장전’이자, 관련 국제규범과 절차의 발전에서 ‘피해자 중심 접근(victim-centered approach)’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에서 정의하고 있는 피해자란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에 해당하는 작위 또는 부작위로 인하여 신체적 또는 정신적 피해, 감정적 고통, 경제적 손실, 기본적 권리의 실질적인 피해를 포함하여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이다. 필요한 경우 그리고 국내법에 따라 “피해자”의 범위에는 직접적인 피해자의 직계가족과 피부양자 그리고 고통받는 피해자를 돕거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개입하다가 피해를 입은 사람도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8조).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에서 피해자의 권리 보장과 관련하여 각국은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을 존중하고, 이에 대한 보장과 이행의무를 지며, 그 의무는 각국이 당사자인 조약, 국제관습법, 그리고 각국의 국내법에서 유래한다(제1조). 만약 각국이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상태라면 국제법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자국의 국내법을 국제법적 의무와 일치시켜야 한다(제2조). 또한 각국의 의무에는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위반행위를 방지하는데 필요한 입법, 행정 및 여타 필요한 조치가 포함되며, 위반행위에 대한 신속하고 철저하며 편향되지 않은 조사가 포함된다. 또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법(Justice)에 대한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회복조치(reparation)를 포함한 각종 조치를 제공해야 한다(제3조).
나아가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은 피해자의 권리를 정의, 배상(reparation), 진실에 대한 권리의 3가지로 분류하고, 상세한 권리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평등하고 효과적인 정의에 대한 접근’을 표제로 하는 정의에 대한 권리는 실효성 있는 사법적 구제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으로 하여 행정적 구제, 국내법에 근거한 다른 장치와 절차들에 대한 접근을 포함한다제12조. 둘째, 피해자에게 각 사건 피해의 중대성과 상황을 감안하여 원상회복(restitution), 금전적 배상(compensation), 재활(rehabilitation), 만족(satisfaction), 재발방지 보장(guarantee of non-repetition)과 같은 완전하고 효과적인 배상이 제공되어야 한다(제18조). 셋째, 피해자들과 대리인들은 피해를 야기했던 원인에 관한 정보와 위반 행위와 관련된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제24조).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일본의 수출규제
이러한 국제인권법상의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해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에 대한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최종 확정 판결이 나오자, 일본 아베 정권은 지난 7월 4일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에 이어 8월 2일 한국의 캐치올(catch all) 제도가 불충분하다며 우호국에 수출통관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그것은 한일 양국이 21세기의 상생과 번영을 위한 평화공동체의 선결과제로서 20세기의 유산인 과거사에서 기인하는 심각한 역사갈등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후 70년 아베 담화에 대해 일본 역사학연구회가 비판한 바와 같이 일제식민지배와 침략의 과거사에 대한 부정에서 나아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과 ‘역사수정주의’의 기치 아래 가해의 역사에 대한 직시가 아닌 독선적 역사인식으로 확대 재생산된 가해의 횡포가 한국의 최첨단 산업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라는 국제통상법 규범을 위반하는 도발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과 과거사의 왜곡을 위한 ‘역사수정주의’ 정책 기조하에 한국에 대해 주장하는 국제법적 논거의 양대 프레임인 ‘1910년 식민지배합법론’과 ‘1965년 한일협정완결론’의 본질을 규명함과 아울러 한국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원한 국제통상법 위반조치들에 대해 국제법 법리에 입각하여 봉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첫 번째 프레임인 식민지배합법론의 근간인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은 대등한 주권 당사국간 합의를 전제로 체결한 형식과 절차상의 하자가 없는 합법적인 조약이 아니라 침략과 강박을 전제로 강요한 불법조약으로서 원천무효사유에 해당한다. 그러한 불법적인 일제식민지배하에서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된 일본군‘위안부’, 강제징용 등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비롯하여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식민지배 자체를 합법으로 전제하고 있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프레임인 한일협정완결론은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나,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및 1995년 식민지배와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담화 시점을 비롯하여 1991년 야나이 슌지 조약국장 및 2018년 11월 14일 고노 다로 외무상의 국회 답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으로 답변하고 있다. 그것은 국제법상 인권을 구성하는 요건인 개인청구권은 국가간 조약으로 소멸시킬 수 없으며 국내법상으로도 자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되므로 소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국회에서의 답변과는 달리 아베 정권은 한국인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완결되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한일 양국 지식인 1,139명이 천명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원천무효 공동성명” 이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헌법소원과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에서 2011년 헌법재판소와 2012년 대법원은 모두 2005년 UN총회에서 채택된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상의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판결로 화답하였다. 그런데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결정과 관련하여 2가지 주목해야 할 사안이 있다. 첫째, 부작위위헌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상의 재교섭, 중재위원회 회부를 요청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거부로 재교섭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둘째, 2014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장급 회의 당시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방사능 수산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수입 규제에 대해 철폐를 요구한 사안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인권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는 WTO(세계무역기구)의 일반적 예외로서 인정되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제20조 b항 상의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 대한 철폐 요구에서 나아가 WTO에 제소까지 했으나 최종 패소하자 WTO에 대한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일본의 수출 규제조치는 첫째, 2011년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한국 정부의 재교섭, 중재위원회 회부 요청을 거부했던 일본 정부가 이번에는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기 위해 요구한 중재위원회를 한국 정부가 거부하자 국제법과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위반을 주장했다. 둘째, 최첨단 산업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의 사유로 신뢰관계, 강제징용 판결, 전략물자 관리제도 등을 번복하며 수출 규제의 타당성을 강변하고 있으나 국제통상법 규범에 대한 전형적인 위반에 해당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우선 GATT 제11조 1항 위반이다. 최첨단 산업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는 자의적인 수출 제한 또는 금지를 전제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수량 제한 금지 원칙에 대한 위반이다. 다음으로 GATT 제1조 1항 위반이다. 세계무역질서에서 최혜국대우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동종 품목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금지하고 있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대 품목에 대해 한국을 차별하는 것은 전형적인 최혜국대우원칙 위반이다. 더하여 GATT 제10조 3항을 위반하고 있다. GATT 체제 하에서 체약국들에 대해 일률적이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통관 및 일반 행정 절차를 제공해야 함에도 일본 정부는 신뢰관계, 강제징용 판결, 전략물자 관리제도 등을 거론하면서 자의적인 수출 규제를 강행했다. 이는 일률적이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통관 및 행정절차의 시행 의무에 대한 전형적인 위반이다. 일본이 제기한 전략물자 관리제도와 관련하여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평가를 보면 미국이 1위, 한국 17위, 일본은 36위로 기록되어 있다.
아베 정권의 정책기조는 제2차 대전 이후 전범국인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를 탈각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의 복귀와 과거사에 대한 반성 대신 역사 자체를 수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국제인권법상의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일본의 식민지배합법론과 한일협정완결론 프레임을 일거에 와해시키자 후쿠시마 방사능 수산물 수입 강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밸류체인(global value chain)을 붕괴시키는 일본의 수출 규제조치의 강행은 전형적인 국제통상법 위반이며, 2차 대전 이전 일본이 추구했던 식민제국주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국제인권법과 역사정의의 과제
아베 담화를 통해 가해자는 끊임없이 가해자 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인권, 정의, 평화에 입각한 국제인권법과 UN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피해자중심주의에 따른 법리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제법을 앞세운 일본의 국제법 위반행위에 대해 우리는 국제사회 평화공동체의 다자간 규범체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해 나가야 한다. 2001년 식민주의의 역사적 종결을 선언한 ‘더반 선언’의 출발점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피해국의 중심축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피해 문제를 국제인권법에 따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오늘 2차 대전의 반성으로 탄생한 국제인권법이 우리에게 던지는 역사적 질문이자 역사정의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