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워싱턴회의’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워싱턴회의(The Washington Conference)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이듬해 2월 6일까지 구미 열강과 일본이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약 4개월 동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되었으며, 워싱턴군비축소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 워싱턴군축회의(The Washington Naval Conference), 또는 태평양회의, 태평양군축회의로도 불린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쳐 한동안 ‘워싱턴체제’라는 용어가 사용될 정도였고, 특히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 회의의 개최 배경과 주요 내용, 특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관련 사실과 그 의의, 오늘의 시사점에 대해 간략히 검토하고자 한다.
워싱턴회의의 한국 대표단 왼쪽부터 이승만, 서재필, 비서 에이번, 정한경, 법률고문 프레드 돌프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워싱턴회의의 배경과 주요 내용
제1차 세계대전(1914. 7~1918. 11) 종전 이후 유럽에는 이른바 ‘베르사유평화체제’가 성립했으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1920년대 초까지 별다른 국제 질서가 구축되지 못했다. 그런데 1921년 3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하딩W.G.Harding(1865~1923)은 수도 워싱턴에서 열강의 해군 군비 축소 및 극동 아시아와 태평양 문제 협상을 위한 회의 개최를 구상했다. 그 해 7월 하딩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중국·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 등 8개국에 이 회의를 제의했다.
제의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성립한 ‘베르사유평화체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안보 문제 대립, 미국과 일본의 중국 진출과 태평양 문제를 둘러싼 대립, 그리고 미국·일본·영국 등 열강의 해군 건함 경쟁에 따른 과도한 군사비 압박 등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협의가 이뤄진 내용은 ①해군 군비 제한: 1만 톤급 이상 주력함 톤수의 비율을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 각각 5:5:3:1.75:1.75 비율로 정할 것, ②잠수함 및 독가스 사용 금지, ③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④태평양 방면 도서島嶼의 속지屬地와 영지領地에 관한 4개국(미·영·불·일) 조약, ⑤중국 산둥반도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중국에 반환할 것,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의 철수 등이었다(김용구, 『세계외교사』, 2016). 미국은 이 회의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회의 결과 이른바 ‘워싱턴체제’가 이루어져 일본의 중국 동북(만주) 침략 직후까지 약 10여 년간 동북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국제 정치 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아·태 지역에서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조선) 문제와는 관련이 없었다. 특히, 하딩은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미·일 간 대립을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미·일 개전을 기대한 한국인의 무장독립운동 전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신효승,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2018). 그럼에도 워싱턴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한국독립운동 진영은 이 회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
미주 지역에서 발행된 독립공채(1919. 7)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이승만과 김규식 공동명의로 발행되었다.
소장: 독립기념관
워싱턴회의와 한국 독립 청원운동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념 성향이나 계파별로 상이한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대표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1919년 파리강화講和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청원하는 외교적 방법론이 실패로 끝난 바 있으나, 상당수 임시정부 인사는 워싱턴회의를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회로 인식했다. 한국 측은 이 회의에 초청받지는 못했지만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대표단장을 맡고 서재필徐載弼, 정한경鄭翰景, 미국인 법률고문 프레드 돌프Fred A. Dolph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한국에 관한 문제가 회의 의제로 선정되도록 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즈음하여 홍진洪震을 중심으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외교연구회를 조직하여 후원했다. 민간단체인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나 한중협회韓中協會도 동참했다. 임시정부 구미위원장 서재필은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여 4만 5천여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자금을 모금하였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과 김규식 공동명의로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교민과 외국인에게 판매하는 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 독립 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준비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동아일보』 등이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유학생 출신의 김동성金東成 기자가 회의 참관 후 여러 차례 기사를 게재했고, 사설에서도 한국 문제 상정 여부를 다루었다. 심지어 회의가 진행되던 1921년 12월 17일 장덕수張德秀 등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무려 1만여 명의 청중이 운집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일부 청년층과 학생들이 이 회의를 기회로 다시 독립운동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상재李商在 등의 13도 지역 대표 367명은 연명 날인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대표단에 보내 활동을 뒷받침했다. 이처럼 워싱턴회의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회의 개최 날짜가 다가오자 조선총독부는 천도교 측에 자숙하라는 경고를 보내 독립운동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를 지원하기 위해 미주 지역은 물론, 만주·연해주·국내 등지에 연락원이나 특파원을 파견하여 광범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예를 들어 경북 청도 출신의 홍재범洪在範은 대구의 외국인 선교사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1923년에 워싱턴회의 독립 청원과 임시정부 독립공채 모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승만 등 한국 대표단은 워싱턴회의 개최 한 달여 전인 1921년 10월 1일 대표단 5인 명의로 「한국의 호소-군축회의 미국 대표단에(Korea’s Appeal to the American Delegation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표단에 전달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8, 2007). 한국 대표단이 미국 대표단에 청원서를 전한 사실은 10월 10일 하루에만 30개 이상의 신문사를 통해 미국 전역에 보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한국 대표단의 강한 독립 의지가 부각되었고, 회의에서 한국(Korea) 문제가 상정될 수 있다는 예측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김명섭·김정민, 『한국정치학회보』 51집, 2017).
미국이 1921년 7월 워싱턴회의 개최를 제안했을 무렵, 미 국무부가 이 회의에 참석할 미국 대표들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작성한 내부 보고서에는 31개 주제 가운데 22번째로 ‘Korea’가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는 미 국무부가 3·1운동 이후 한국인들이 ‘독립’을 요구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정휴,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5호, 2003).
그러나 실제로 한국 문제는 상정도, 거론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심지어 한국 대표단은 회의 장소에 입장할 수도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내정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한국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한 ‘외교독립’ 방략은 파리강화회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와 관련하여 종래에는 워싱턴회의에서의 한국 독립 청원 외교와 이승만 등 한국 대표단의 활동 등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최근에는 이승만 등의 공공외교를 포함하여 일부 언론 및 미국인의 한국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 등의 성과를 주목하는 시각도 대두했다(김명섭·김정민, 『한국정치학회보』 51집, 2017).
이승만은 회의장 밖에서 영국의 웰스H.G. Wells 등 언론인을 상대로 한국 독립 문제를 설득하고 신문에 보도케 하는 등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 또 미국 상원의원 스펜서Selden Palmer Spencer는 미 국회 의사록에 기록된 한국의 독립 호소, 한국 대표단이 제출한 홍보 자료 등을 모아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라는 책자를 제작하고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한국 대표단 법률 고문 프레드 돌프Fred A. Dolph는 1921년 4월 『한국에 관한 개요(Brief For Korea)』라는 소책자를 미 국무장관 휴즈Charles Evans Hughes에게 발송하고, 일제의 불법적 식민지 지배와 통치 미화, 가혹한 수탈을 비판하기도 했다.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한국의 호소
소장: Harvard Law Library
워싱턴회의의 결과와 오늘의 시사점
워싱턴회의의 실패로 인해 외교독립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려 한 이승만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한국 독립 문제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국내외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내각은 사의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1922~23년경 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장이 제기되었고,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파’와 ‘개조파’의 치열한 논쟁과 대립,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에 대한 전망이 약화되면서 소위 문화운동과 자치운동이 대두했고, 사회주의 운동도 고조되기 시작했다.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였던 중국 동북(만주)과 연해주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며, 스스로 독립운동의 중심 지역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 동북에서 활동하던 한 지사는 “만일 우리가 독립을 원치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독립을 하자면 혈전血戰으로 뒤를 받들지 않고야 외교의 무슨 효력을 기도하겠는가. 뛰어난 외교를 하노라고 거대한 재정을 없이 하는 이보다, 우리의 뒤를 먼저 충분히 준비함이 낫지 않는가.” 하고 비판하였다.
국내외 각지의 민족운동 세력은 한국 독립 문제가 외면당한 워싱턴회의의 종결을 이승만이 주장한 친미 외교 노선의 몰락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결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에 탄핵, 면직 처분을 내리고 구미위원부를 폐지하는 비상조치를 내렸다. 다만 구미위원부는 이승만 등에 의해 유명무실하게 명맥을 유지하다 1941년 6월 ‘주미외교위원부’로 부활했다. 결국, 워싱턴회의 직후 한국 독립운동은 전반적으로 퇴조기에 접어들었고, 민족운동의 흐름과 주도층도 바뀌었다.
1919년 4월 16일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에 호응하여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들이 ‘자유대회’를 개최하고 시위 행진을 하는 모습
소장: 독립기념관
1922년 1월 24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극동민족대회(일명 극동근로자대회, 혹은 제1회 극동공산주의 및 혁명단체대회)’가 열렸다. 이날 열린 ‘극동민족대회’ 본회 석상에서 「조선(한국)의 혁명운동」이라는 제목의 보고가 행해졌다. 보고자는 1919년 3·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던 김규식(1881~1950)이었다. 그는 극동민족대회 한국 대표단 단장이었다(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2003).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관한 이 대회에는 한국 대표가 52명이나 참석했다. 중국 대표 42명, 일본 대표 16명과 몽골·인도 대표 등 총 144명이 참석했는데, 한국 대표단이 전체 대의원의 36%나 될 만큼 비중이 컸다. 이 대회에 대한 한국독립운동가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한편으로는 워싱턴회의에 대한 반감과 실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1년 출범한 중국 공산당은 각종 선언이나 문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했지만, 기본적으로는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상해 임시정부가 초창기에 외교를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구미歐美 열강에 의존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독립을 추구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시국에 대한 주장」, 1923년 7월).
우리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구미 열강이나 중국 정부·군벌, 중국인 유력자의 도움과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중국국민당 외에는 실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를 주름잡는 초강대국 미국과 이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재부상한 중국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와 생존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 있고 강한 응집력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 역량과 의지, 현명한 판단과 지속적 실천, 이를 뒷받침하는 국내외 협력 네트워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100년 전의 워싱턴회의에 즈음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 등의 한국 독립을 위한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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