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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관동대지진의 기억·기록·기념, 인류 평화와 용서와 화해를 향한 길 어느 원로 역사학자가 말하는 내가 소망하는 것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상지대 이사장, 시민모임 독립의 이사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최근 발간한 저서로 역사의 길, 현실의 길: 이만열 교수의 세상 읽기(푸른역사, 2021),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 개정판: 이만열의 삶과 생각(새물결플러스, 2020), 역사, 중심은 나다 개정판(나녹, 2019) 등이 있다.

 

 

관동대지진 발발 100주년을 앞두고, 자연재해를 빌미로 벌어졌던 일본 정부의 사상 단속과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들로 분주하다. 대지진이라는 시련 속에서 사회 혼란과 위기감을 소수자 차별과 혐오, 그리고 범죄로 극복하려 한 98년 전의 사건은 전 지구적 팬데믹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혐한을 선동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대상 제노사이드를 부정하거나 정당화하는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이를 둘러싼 역사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올해 8,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이 거리에, 국회에, 강연장에 나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평생 실천하는 역사학자로서의 삶을 이어온 이가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터뷰 | 박정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인터뷰01

 

 

관동대지진 발발 100주년이 2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 선생님께서 진상 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십여만 명 이상이 죽고 45만 채의 집이 불타버려, 국가 재정 가운데 약 3~4조가 파괴되었습니다. 일본은 대혼란 상황에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대지진으로 잃은 인명과 재산을 보상받을 길은 없지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조선인에게 지움으로써 심리적 대리 만족,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침 일본의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기 때문에 조선을 잘 알았고, 그 밑의 경무국장 등도 조선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조선인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잘 알았지만, 의도적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활용해서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조선인에게 전가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인 개인에 대한 핍박이나 학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민족 문제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91일 오전 1158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날부터 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즈노 렌타로 등이 주도하여 다음 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표적을 정하고,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빠르게 잠재우려 했던 것입니다. 군인과 경찰 외에도 도쿄에서만도 1천 개가 넘는 민간단체 자경단이 관청의 방조 하에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데 관여했지요.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선 겁니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조선인 식별에 관한 여러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탁음이나 라행()’ 발음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쥬고엔 고쮸 고센(1555)’이나 라리루레로를 말해보라 하여 발음이 의심스러우면 조선인으로 보아 처단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는데요,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가 쓴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 학살의 잔향(서울리다리티 옮김, 갈무리, 2015)에는 아라카와 강변의 옛 요쓰기바시 부근에서 사람들을 일본도로 자르거나, 죽창이나 쇠막대기로 찔러서 닥치는 대로 죽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임신한 여성까지도 죽였다고 해요. 그 증언을 보고 저는 이건 너무한 정도가 아니다, 인륜에 반하는 참 나쁜 짓을 했구나 하면서 큰 분노가 일었어요.

 

 

 

완전히 광기에 휩싸인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요. 당시 불법 행위에 대한 규제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피해 규모나 피해 양태 또한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가 현재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요?


우선 1923년에서 1945년까지는 일제가 언론을 비롯해 모든 것을 통제했습니다. 그러니 조선 사람이 관동에 가서 조사하기가 힘들었죠. 당시 상해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김승학金承學은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한세복韓世復을 도쿄로 파견해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1923125일 자 독립신문에 조선인 피살자가 6,661명이라고 발표합니다. 강덕상姜德相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관동 지역에 조선인이 약 2만여 명 살았는데, 지진 사건으로 강제 수용된 인원이 11천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9,000명이 다 죽임을 당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6,661명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동양 미술을 전공하며 일본에 체류 중이던 독일 미술사학자 브루크하르트Otto Bruchhardt91일부터 98일까지 도쿄와 요코하마에 있었습니다. 이분이 독일로 돌아가서 그해 109일 자 보쉬체 짜이퉁 신문Vossische Zeitung에 기고한 한인에 대한 일본의 대량 학살이라는 글을 보면, 요코하마에서 참살당한 조선인은 15천 명, 비극을 맞은 전체 인원은 2만여 명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 분을 찾아가서 질문하니 이 내용은 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당시 요코하마에서 발행한 영자 신문에도 실려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북한에서 1983년에 조선전사 연표를 발행하면서 조선인 23천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당시 부르크하르트의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일을 비롯하여 스위스에서 발행된 신문에도 해당 내용이 보도되었다고 하고,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들에도 이 내용이 공식적으로 게재되었다고 하니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인터뷰02

 

 

증언이나 정황 증거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도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가 아직도 본격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해온 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게 너무 이상해요. 한국 정부가 식민지 시대의 일이니까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2010년에 한국과 일본의 지성인들이 이에 대해 반성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2천몇백 명의 지식인 중 일본인이 절반 정도 됩니다. 그때까지는 일본의 시민단체가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것은 탈법적이고 불법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배도 원천 무효다.”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이었습니다. 그것은 1965년 한일협정 때부터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는 처음부터 원천 무효였다.’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일본 지식인들이 동조한 거예요.


이에 근거해서 보면,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은 식민지 하의 조선 민족이 아니라 일반 조선 국민을 죽였다는 의미가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 정부는 너희가 우리 국민을 죽였으니 책임지라고 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무슨 이유가 있는지 우리 정부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요. 정부가 안 하면 국회가 일어나야 하고, 시민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나마 19대 국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는데 임기 만료로 폐기됐어요. 20대 국회에서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제안되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습니다. 그리고 이어 21대 국회에서는 지난 96일에 학술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그 토론회에서는 후속 조치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 시작된 91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할 것 등을 논의했습니다.


우리 역량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여러 가지를 해보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뼛조각이 나와도 누구의 것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DNA 검사를 하면 후손을 찾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일본 정부로 하여금 발굴지에서 나오는 유해의 DNA를 분석하도록 하고, 한국인 후손들을 조사해보면 당시 도쿄에서 가족이나 친족이 죽었다는 증언 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천 명이 될지 21천 명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자기 정체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혼령들의 정처定處를 찾아주는 것도 한일 양국이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인터뷰03

 

 

학살로 생명을 빼앗긴 희생자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많은 분의 의지와 끈기가 필요한 일이라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최근 역사부정주의자들이 일본 우파들과 연대해서 글로벌하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램지어 교수가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긍정하는 글도 썼고요.


램지어 교수는 일본 우파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건 일본의 양심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돈이 움직인 거예요. 이런 문제는 단순히 램지어와만 연관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일종족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을 위시한 국내의 역사부정론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결국 진실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진실을 캐는 일은 역사학자들이 해야 하고,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런 허망한 이론들을 엎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단의 사명이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04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국가 폭력의 비극성이 다시 반복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생기고, 우리의 경각심을 깨우쳐줬습니다. 관동대지진 또한 국가 폭력이 저지른 제노사이드 문제로 더불어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나는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의 만행을 따지는 것 못지않게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내어놓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일본이 그 사죄와 반성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만행을 일종의 제노사이드라고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는 제노사이드가 없었습니까? 민간인이 학살된 제주4·3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도 있었죠. 우리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일본의 학살 건에 대해서는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일의 진상을 반드시 규명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가는 이런 사실을 주장함과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깊게 반성하고 스스로를 돌아볼수록 상대방을 움직여 전달되는 힘이 커집니다. 일본의 책임과 진실을 추궁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의 홀로코스트 혹은 제노사이드를 반성해야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록과 사실에 바탕을 두고 따져 나가야겠지요.


일본이나 우리 자신을 향해서 따지는 것은 단지 잘못을 들추고 상처 내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진실을 밝히고,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화해하고, 역사 앞에서 겸손해지기 위한 것이지, 흠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밝혀서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와 용서와 화해에 접근하는 것,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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