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수도로 비정되는 오녀산성(五女山城)과 그 일대의 모습
1914년, 조선 땅을 떠나 망명 중이던 신채호는 윤세복의 초청을 받고 중국 요령성 환인(桓仁, 당시 봉천성 회인)의 동창학교를 찾는다. 도쿄제국대학 인류학교실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蔵)가 이곳을 처음 다녀간 지 9년 만이었고, 이곳을 다시 조사한 도리이가 오녀산성(五女山城)을 고구려 도성으로 비정한지 1년 만이었다. 1년간 환인에 체류하며 동창학교의 교사로 생활하던 신채호는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며 광개토왕비를 둘러보았으면서도, 정작 환인의 고구려 유적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곳이 고구려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잊혀진 땅
누군가는 역사를 공부하러, 누군가는 백두산 여행 중의 기착지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고구려의 발상지인 환인을 찾는다. 그러나 이 발길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이후의 이곳은 오래도록 변경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 이후에는 잊혀진 땅이었다. 이곳은 신라와 발해, 거란, 여진의 중심지에서 멀었고,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지만 그 발상지까지 관심에 두지는 않았다. 청이 건국한 17세기 이후에는 약 2백여 년 간 봉금지(封禁地)로 설정되어 사람의 출입이 없었고 미지의 땅이 되었다.
명의 몰락과 청의 성장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압록강 너머 땅에 대한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이에 비로소 고구려 발상지와 이곳의 관련성이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현장 답사가 결여된 탁상 논의일 뿐이었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은 그 의도와는 별개로 고구려를 좇아 이곳을 찾았다. 고구려의 역사를 미개하고 정체된 역사로 묘사하는 와중에, 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믿지 않았다. 도리이 같은 소수의 이견은 있었지만 고구려의 발상지는 관심 밖이었다.
상고성자 고분군
(필자 제공)
댐 건설로 사라진 유적과 유물
1960년대 이래, 중국은 몇 차례에 걸친 성(省) 단위의 고고 조사를 실시했고, 집안(集安) 일대와 더불어 환인 일대에서 무수히 많은 고구려 적석총이 조사되었다. 이로써 환인과 집안은 고구려의 중심지로 확인되었고, 특히, 환인은 고구려의 발상지로 확정되었다. 환인의 유적과 유물이 집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환인 지역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혼강과 지류들이 그 사이를 곡류한다. 그리고 그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 충적 대지에 이른 시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밀집해 있는 망강루 고분군, 상고성자 고분군, 고려묘자 고분군 등이 분포한다. 또 이 고분군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 고구려 시기의 평지성 유적인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유적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나합성(喇哈城), 최근 고구려 초기의 중심지로 주목받는 고려묘자(高麗墓子) 일대는 1968년 완공된 환인 댐 건설과 함께 수몰됨에 따라 실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환인 일대 고구려 유적 분포(필자 제공)
풀리지 않은 숙제
환인 일대가 고구려 초기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가운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세 가지 있다. 첫째, 평지 중심지의 위치 문제이다. 수려한 경관의 오녀산성이 환인의 랜드마크이자 초기 도성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고구려 왕의 평상시 거주처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고성자성, 고려묘자 일대, 나합성 등이 거론되었지만, 뒤의 두 곳은 수몰된 지 이미 50년이 넘었고, 하고성자성은 자세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지 중심지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둘째, 오녀산성의 비정 문제이다. 환인을 고구려 발상지로 비정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래, 오녀산성은 문헌 사료에 최초의 도성으로 등장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 혹은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되어 왔다. 반면, 문헌 사료에 묘사된 국내 위나암성(尉那巖城)의 지형 기록을 근거로, 오녀산성을 두 번째 도성인 국내 위나암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2010년대 이르러 제기되었다. 전자의 경우 오녀산성 외에는 국내 위나암의 위치를 찾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졸본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는 광개토왕비의 기록을 해석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셋째,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기 문제이다. 문헌 사료에는 천도로 볼만한 기록이 1세기와 2세기에 한 건씩 있을 뿐인데,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집안 지역이 도성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환인과 집안에 대한 자세한 발굴 조사와 보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여행할 날을 기다리며
1990년대 이후 이어진 한국 연구자 및 관광객의 발길과 이에 반응한 2000년대 중국의 조사 및 정비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고구려 초기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리고, 상당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잊혀진 기억, 끊어진 발길이 복구된 결과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변경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여행은 어려워지고, 국경도 닫혔다. 모쪼록 관광 수입이 줄어든 변경의 작은 마을이 건강하길 바라며, 기억과 발길이 다시 이어지길 기다린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유적에 대한 조사와 보고, 정비를 오로지 중국에 맡겨둔 입장에서, 아직 못다한 조사와 보고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입장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소유권 주장은 허망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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