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 지역인 졸본(卒本)에서 건국했고, 어느 시점엔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집안 지역인 국내(國內)로 왕도를 이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 21년(서기 2)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쫓던 신하가 ‘국내 위나암(國內 尉那巖)’이라는 곳에 이르러, 이곳의 뛰어난 지세와 물산의 풍부함을 유리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듬해인 유리왕 22년(서기 3)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427년 평양으로의 재천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집안 지역이 고구려 성장기에 왕도로 기능하였던 점만큼은 분명하다.
집안 지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 유적(출처: 필자 작성)
전란의 아픔이 깃든 왕성, 환도성
집안 지역에는 두 개의 왕성 유적이 존재한다. 하나는 산지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자 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집안 평지성이다. 전자는 역사 기록에서 확인되는 환도성, 후자는 국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산성자 산성은 계곡을 품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동쪽·북쪽·서쪽이 높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고, 능선을 활용해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총길이는 6,947m다. 성문은 서쪽에 1개, 동쪽·남쪽·북쪽에는 각각 2개씩 총 7개다. 정문은 지대가 낮아 전방이 개방돼 있는 남쪽 방향에 조성되어 있고, 그 앞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가 지나간다.
산성자 산성 내부에서는 2000년대 초반 발굴 조사를 통해 궁전터가 발굴됐다. 남북 95.5m, 동서 86.5m의 규모이며, 기와편과 와당이 풍부하게 출토되는 고구려 문화층도 확인됐다. 궁전터 내에서 확인된 팔각형 건물지 2개는 형태가 매우 특이해 사직(社稷)이나 시조 사당 등으로 그 기능을 추측하기도 한다.
환도성 및 성내 ‘궁전터’의 평면도(출처: 고구려연구재단, 2005, 『고구려 문명 기행』, 고구려연구재단, 127쪽;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丸都山城: 2001-2003年 集安丸都山城調查試掘報告』, 文物出版社)
환도성은 일찍부터 중국 측 기록에 그 이름이 확인되는 고구려의 왕성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란과 관련된 기록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244년 위(魏)의 장군 관구검(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 동천왕대의 일이다. 동천왕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관구검의 군대를 요격하려 했으나, 결국 크게 패배했다. 관구검은 도주하는 동천왕을 뒤쫓아 고구려의 왕도에 이르렀고, 환도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했다고 한다.
약 100년 뒤인 342년에는 선비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해 환도성이 재차 함락되는 일이 있었다. 이 당시 고구려의 군주였던 고국원왕은 도주에 성공했지만, 전연의 군대는 왕의 어머니와 처를 포로로 잡고, 부왕인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해 시신을 탈취한 후,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린 후 남녀 5만여 구의 포로를 이끌고 철수했다. 이처럼 환도성은 성장기 고구려의 아픈 기억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산성자산성(환도성)의 전경(출처: 고구려연구재단, 2005, 『고구려 문명 기행』, 고구려연구재단, 118쪽)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의 중심지, 국내성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국내성으로 여겨지는 곳은 집안 평지성이다. 집안 평지성은 돌로 쌓은 방형에 가까운 성이다. 인구가 밀집해 있는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원래 규모는 둘레 2.7km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집안 평지성(국내성)과 주변 모습(출처: 필자 작성)
국내성이 조영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문헌상 ‘국내성’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342년(고국원왕 12)이다.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국내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4세기 중엽이 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4세기 초로 보기도 하고, 혹은 동천왕이 관구검의 침입 직후 난리를 겪은 환도성에서 나와 ‘평양성’을 쌓고 백성을 옮겼다는 기록을 근거로 3세기 중엽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국내성을 왕성으로 사용하며 국력을 키워나갔다. 소수림왕대의 체제 정비와 광개토왕대의 정복 전쟁이 모두 국내성을 왕성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이뤄진 일이다. 근대 이후의 도시화로 인해 집안 평지성 안팎에 시가지가 조성돼 지금으로서는 고구려 당시 국내성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집안 시가지 지하에는 지금도 고구려가 들려주고 싶어하는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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