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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5일 그날을 기억하다
역사포커스 1919년 4월 15일 그날을 기억하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9년 3월 1일, 조선 민중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고 만세를 부르짖었다.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자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를 갈망하는 몸부림이었다. 화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식 민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80여 개의 산상에 오른 화성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에 대한 염원을 품고 횃불을 치켜 들었다. 화성의 각 지역에서는 마을 내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화성지방의 만세운동은 비폭력의 원칙이었지만 우정 면과 장안면 일대의 화수리 항쟁에서는 대규모 시위대의 규합과 사전협의를 통한 일제 통치기구에 대한 조 직적 타격이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시위대와의 격전 끝에 처단되었다. 당시 일제는 화성지방의 화수리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장단군 강상면의 시위와 함께 ‘가장 광폭한 시 위’의 하나로 보았다. 헌병대의 보고에서도 ‘이 지방의 폭민이 열악(獰惡), 광폭(狂暴) 한 것은 다른 데서는 많이 예를 보지 못하는 바’라고 말할 정도였다. 화수리 항쟁의 여파로 남양과 사강 소재의 경찰관 주재소가 일시 철 수하면서 곳곳에서는 일본인을 처단하고 시장을 괴멸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이는 독립운동 주모자 들이 가족들을 타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정황이 포착되 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이혜영(화성시 문화유산과 학예연구사)
사할린 한인에게 전해진 고국의 온기(溫氣),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기고 사할린 한인에게 전해진 고국의 온기(溫氣),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홋카이도 북쪽으로 길게 뻗은 섬 사할린. 길이는 한반도와 비슷하지만, 폭이 좁아 한반도 면적의 80% 정도인 이곳은 니히브족과 아이누족이 살던 곳이다. 1800년대 말 제정러시아의 동진과 이를 경계하는 청·일과의 관계 속에서 사할린섬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1945년까지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남사할린은 일본의 영토였다. 당시 화태, 혹은 가라후토라 불리던 이곳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동원 등의 이유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사할린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크게 북사할린에 거주했던 고려인들과 일본령인 가라후토로 이주한 한인들로 나뉜다. 현재 사할린 한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주로 일본령 가라후토에 이주했던 이들을 말한다. 구소련지역 러시아어권 동포인 카레이츠를 고려인이라 부르는데, 고려인은 연해주 지역과 북사할린에 거주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이들이고, 사할린 한인은 일본으로 강제동원 되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 이주 15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인과 러시아 편입 70여 년의 사할린 한인은 역사와 정체성이 다르다. 그래서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을 고려인이 아니라 한인이라 칭한다.
최상구(KIN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
3ㆍ1 운동 100주년 다시보기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오늘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주는 의미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던 만주(중국 동북) 지역까지 확산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19년 3월 13일(목요일, 음력 2월 12일), 북간도(현재의 중국 연변지역) 용정(龍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운동에는 최대 3만여 명의 많은 동포가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현재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3·13반일시위운동’ 또는 ‘3·13반일군중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 영사관 당국은 참여 군중을 6천여 명으로 축소하여 보고했지만, 중국 당국은 2만여 명의 많은 한인이 참가했다고 파악했다. 반면 계봉우(桂奉瑀)는 참가자가 3만 명을 넘었다고 보았다. 연변 3·13 운동 당시 현장에서 「독립선언 포고문」이 살포되었다. 이 포고문은 ‘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 명의로 작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김약연 등 17명의 ‘재남북만주(在南北滿洲) 조선 민족 대표’ 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도 공표되었다. 김약연은 후일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연변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지사였다. 그런데 그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지들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상해(上海), 일본 동경(東京), 그리고 국내외 등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국제질서 재편의 새로운 기세를 감지하고 국내외를 망라한 거족적 독립운동을 준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3·13시위운동’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이들은 ‘3·13독립축하회 – 바로 용정 3·13운동’ 개최 이후 열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지원,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한 후 독립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략을 모색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3·13운동 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축하회’를 개최했으므로, 이제는 독립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그런데 그 정부의 형태는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 정부여야 했다. 특히 임시정부와 같은 공화주의 정부여야 한다는 논리와 주장이 널리 전파, 확산되었다.
장세윤(재단 운영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