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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 대표, 프랭크 스코필드를 기리다
  • 신효승(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 대표, 프랭크 스코필드를 기리다프랭크 스코필드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과 더불어 또 한 명의 민족대표로 불린다. 3·1운동에서 스코필드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표현이다. 특히 그는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우리 민족이 처하게 된 엄혹한 상황과 거족적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운동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윤치호조차 자신의 일기에 스코필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의 정책, 즉 일본인 이주민을 위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몰아내는 냉혹한 정책과 최근의 잔학행위에 격분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이 집필 중인 책에 활용할 정확한 자료들을 정력적으로 수집하고 있고, 고위 관료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일본인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스코필드 박사는 선교사로서는 본분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친구로서는 모든 찬사와 감사를 충분히 받을 만하다.”

국역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20일


스코필드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적극적으로 규탄하는 등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정확한 자료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담은 사진은 스코필드의 의도에 가장 걸맞은 수단이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일본의 선전과는 달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며, 3·1운동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독립투쟁이라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알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일본은일본 경찰을 살해한 폭동을 일본군이 진압한 사건으로 감추려 했지만 스코필드는 사진으로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일본의 3·1운동 탄압과 그 과정 중에 일어난제암리 학살사건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구 언론은 일본을 ‘Korea, the Belgium of Oriental Lands’라고 불렀다. 여기서벨지움(Belgium, 벨기에)’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벨기에에서 일으킨 민간인 학살행위를 의미하고 있으며 연합국이 단결해 독일에 대항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일본의 행위를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벨기에에서 일으킨 잔학행위와 같다고 비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이었고, 심지어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와 함께주요 교전국 위원회(The Inter-Allied Conference’)를 구성하는 열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언론이 일본의 행위를벨지움Belgium’에 비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잔학행위를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정확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는 3·1운동에 대한 세계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사실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본군이 제암리 일대에서 일으킨 만행은 일본이 선전하는문명화이면에 감춰진 속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일본의문명화는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정당화시킬 수 있으며, 제암리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의 재판에서 보듯 일본이 제정한 법령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코필드가 사진 등을 통해 제시한 이른바정확한 증거는 일본의 지배가 갖고 있는 추악한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코필드는 제도의 틀 안에서 일본의 만행을 입증하려 했다. 그는 사진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기꺼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에는 서울에서 수원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코필드는 수원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진기를 들고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수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서울에도 포장도로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는 콜레라에 걸려 몇 달씩 치료를 받는 중이었기에 아직 요양이 더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이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직접 현장에 나선 이유는 당시 한국 내에서는 한국인 그 누구도 일본을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일본의 적법한 제도 안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비판하고자 하였다. 스코필드는 일본의 허가를 받고 제암리 사건을 촬영했다. 아무리 결정적인 증거라 할지라도, 적합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일본은 절차적 신뢰성을 이유로 사진의 증거적 가치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코필드는 이러한 절차적 신뢰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탄압을 비판할 수 있었다.


스코필드는 전문가로서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18년 세계대전 중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일명스페인 독감즉 인플루엔자가 1918년 말 한국에 돌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연구 결과를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라는 제목으로 미국 의학회지(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19년 게재했다. 그는 이것을 연구로서만 남기지 않았다. 일본이 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전했던서대문 형무소가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밝혀내는 등 일본의 한국 지배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한국인에 대한 그의 열정과 헌신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의 정책, 즉 일본인 이주민을 위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몰아내는 냉혹한 정책과 최근의 잔학행위에 격분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이 집필 중인 책에 활용할 정확한 자료들을 정력적으로 수집하고 있고, 고위 관료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일본인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스코필드 박사는 선교사로서는 본분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친구로서는 모든 찬사와 감사를 충분히 받을 만하다.” 

국역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20일


스코필드가 한국을 떠나던 날 윤치호가 그를 배웅하며 남긴 이야기다. 윤치호의 평가처럼 스코필드가 3·1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위해 증거를 남긴 것은 단순히 친한(親韓)적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강점에 맞서 독립을 찾고자 하는 3·1운동의 정의와 인간애가 그 바탕에 존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