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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한 맺힌 곳, 서대문형무소
  • 대담(윤현주 작가)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한 맺힌 곳, 서대문형무소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충남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재직하면서 근대감옥과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관련 논저로 「독립운동 공간의 기억과 기념」, 3·1운동 관련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현황과 특징」, 「해방 후 서대문형무소 운영과 변화」,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현황과 특징」,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 일상」 등 30여 편이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여느 박물관과는 좀 다르다. 단순히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품을 보존, 진열하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이 아니라 서대문형무소 그 자체가 역사의 상흔이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80여 년간 수형 시설로 사용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에는 수많은 독립투사와 민주 항쟁 열사들이 투옥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 서대문형무소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또한 이 같은 이유다. 서대문형무소 박경목 관장을 만나 서대문형무소가 지닌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투사들의 한 맺힌 옥중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Q

매년 65만 명의 방문객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보니 더욱 바빠지실 것 같은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A

3·1운동 100주년이다 보니 관람객이 조금 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많은 관람객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주시기 때문에 눈에 띄는 수치 변화를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요즘에는 3·1운동 100주년 관련 영상촬영이라든지 보도 기사 의뢰가 눈에 띄게 늘고, 행사 관련 문의도 많은 편이라 하루하루 바쁘고 보람차게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Q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서 서대문형무소도 특별한 계획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A

서대문형무소는 국가사적 324호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일본이 건립했음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몇 안 되는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독립운동 관련 문화재들, 주로 등록문화재를 한데 모아서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문화재로 깃든 100년 전 그날』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이육사의 친필원고, 조소앙이 친필로 쓴 건국 강령 초안 그리고 3·1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4 21일까지 열릴 예정입니다.


또한, 3·1운동기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의 수형기록카드를 추려서 자료집을 발간했습니다. 수감자 중 3·1운동 참여자 1,014명의 자료를 한데 모으고 지역별 분류를 통해 3·1운동의 전체적 특징을 조명해 냈을 뿐 아니라 학계 전문가를 통해 학술적 고증도 마쳤습니다. 3·1운동 수감자를 대상으로 이런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Q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많으셨죠?

 

A

그렇습니다. 수형기록카드는 이미 국사편찬위원회에 공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가 3·1운동을 한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3·1운동가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집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작업량도 무척이나 많았고 수형기록카드에 쓰인 글씨를 읽고 확인하는 작업도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수형기록카드를 작성할 때 흘려 쓴 글씨가 워낙 많은 데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아서 일일이 대조하는 게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이 자료집이 연구 자료로 배포되었을 때 가지는 교육적 효과와 의미는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공훈인데요. 1,014명 중에 670여 명은 이미 공훈을 받았지만, 아직 공훈을 받지 못한 340여 명의 운동가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훈 및 서훈 자료로도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서대문형무소 하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원 중에서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각나는 인물이 있으시면 소개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가장 대표적인 분이라면 안창호 선생이 있을 겁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온 안창호 선생은 1935년에 이곳에 갇힙니다. 이후 판결을 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35년도에 출옥을 하게 되죠. 그런데 출옥 후에도 동우회 활동을 이어가다 1937년도에 또 수감됩니다. 이규채라는 독립운동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창기에 의정원 의원을 지내신 분인데 이분 말고도 군자금 모금으로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광복결사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선독립군사령부 소속인 한우석, 김동순 선생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Q

감옥이 독립운동을 도모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 우려한 일본은 이를 제재하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를사상범으로 분류해 관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수감자 관리 방식이 일반 수감자와는 달랐나요?

 

A

징역은 단순히 교도소에 사람을 가두는 형벌이 아닙니다. 징역(懲役)은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생산 활동을 시키는 건데 사상범들은 노역에서 제외됩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죄수들과 분리해 두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사상범으로 규정하고 특별 관리를 하였습니다. 사상범들에게 노역을 시키게 되면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모의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독방에 수감하고 작업을 하더라도 독방 안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을 시킵니다. 물론 시설이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완전히 분리 못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분리해 놓고자 했습니다. 별도의 구치감을 둬서 완전히 격리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일본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사상범들의 사상이 일반인들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해서 수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감염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거 작업이 이뤄지면서 수형자의 수가 감옥 수용인원을 넘어서게 되자 30년대 이후에는 사상범들도 물자 부족을 이유로 노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사상범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노력이라는 게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제한하는 겁니다. 배식을 할 때 등급을 1~9등급으로 나눠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밥을 준다든지 입는 옷을 제한하는 등의 방법을 쓴 겁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사람을 평가하는누진 처우제가 있습니다. 사상범의 경우누진 처우제적용 대상이 아니지만나는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고 사인을 하면누진 처우제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감옥이라는 공간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한 곳입니다. 이규창이라는 이회영 지사의 아들이 이곳에 수감이 되었는데 한겨울에 창살에 손을 놓고 20~30분 정도 있었더니 동상에 걸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더위에 똥이 끓었다고 하고요. 이런 환경에서 버텨내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었을 겁니다.


 

Q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8호 감방은 유관순 열사가 수감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을 모티브로 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1919 유관순>도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 여성 독립운동을 한 여성 수감자는 얼마나 됐고, 수감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A

자료집을 만들면서 찾은 3·1운동 수형자기록카드 1,014명 중 33명 정도가 여성의 카드였습니다. 수치만 두고 생각했을 땐 3.3%라 미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 소요사건 통계자료나 기타 자료를 보면 3·1운동에 참여한 여성의 수감비율은 3%를 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서대문형무소의 여성 수감자 3.3%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죠. 그리고 실제 독립운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여성들의 참여가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돕는 건 결국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들이었으니까요. 그동안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묻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조사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성 수감자들의 수감생활은 남자 수감자보다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노역을 나간다고 하면 여름 같은 경우에는 아침 6시에 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성들의 경우 1시간 정도 먼저 준비를 시작합니다. 여성들은 감옥에서 머리를 쪽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머리를 매만져야 하기 때문이죠. 공장으로 이동할 때도 옷을 다 벗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여름은 괜찮겠지만 겨울에는 그 과정이 무척 복잡합니다. 수치스러움 또한 상당했을 겁니다. 여기에 여성 감옥의 경우 남성 감옥보다 면적이 좁아 수감밀도가 높았습니다. 또한 관리 인력이 적어서 나타나는 문제점도 많을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자주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양육의 문제도 있습니다. 1930년대 항일투쟁의 중심이 있었던 박진홍은 임신한 상태로 수감되어 감옥에서 출산하게 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철한인데식민지라는 철창에 한이 맺혔다라는 의미로 박진홍이 지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시간은 1, 이후 박진홍은 아이를 친정에 보냅니다. 그런데 박진홍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날 친정엄마가 아이를 안고 재판정에 가죠. 그걸 기자들이 특종이라고 찍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3·1운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A

저는 3·1운동이 국민 대통합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모두 달랐지만 오로지독립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뭉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3·1운동이 국민 대통합의 의미가 있다고 보고 소통과 화합이 나라를 변혁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 생각합니다. 3·1운동을 통해 근대적 민족 개념이 생겼던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프랑스 시민혁명을 통해 발현되었지만 우리나라는 3·1운동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근대적 민족개념을 발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을 조성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