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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 선언에  어떻게 '자유 독립'을 관철시켰나
역사포커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 선언에 어떻게 '자유 독립'을 관철시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의 영수들이 회의를 하고, 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카이로선언으로 발표했다. 이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한국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중요한 선언이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카이로선언에 한국의 자유 독립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장개석을 움직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카이로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얻어낸 성과였다는 말이다.
한시준(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진으로 보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풍경
3ㆍ1 운동 100주년 다시보기 사진으로 보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풍경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와 관련한 학술회의와 전시회, 언론의 기획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방송과 신문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당시의 시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혹여 눈이 밝은 시청자나 독자라면 아래의 사진을 여러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 1과 2가 언제 어디에서 열린 시위를 촬영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한문 앞의 만세시위 사진이다.’라는 설명이 가장 자세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두 사진 어디에도 대한문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낯선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육지측량부가 1915년 측도해 발행한 서울 지형도를 보면, 대한문 인근 지금의 서울 도서관(구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경성일보사가 위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필동에 있던 경성일보사는 1914년 10월 17일 현재의 서울 도서관 위치로 사옥을 이전한다. 1915년 11월 18일 화재로 당시 목조로 지어진 건물의 절반이 소실되어 1916년 10월 1일 새로운 사옥을 지었는데 사진 속의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사진 속의 장소는 대한문(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으로 특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촬영 일자는 확정할 수 없을까? 이는 1920년 뉴욕의 Abingdon Press에서 발간된 신흥우의 『The Rebirth of Korea』에 실린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앞의 사진 2장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3에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덕수궁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The Rebirth of Korea』는 배재고보 학당이던 신흥우가 1919년 3월 미국 오하이주에서 열린 미 감리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한 후 여러 곳에서 행한 강연문을 모아 펴낸 책이다. 신흥우는 3·1운동 당시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3월 1일 시위에 참가하거나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19년 10월에 쓴 이 책의 서문에서 정부 기록과 공식적인 진술, 신뢰할 만한 문서와 증언에 따라 서술했음을 밝히고 있어 사진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위의 사진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에서 열린 만세 시위 모습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서현주(재단 교육홍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