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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1919. 10. 11
노령·상하이·한성정부가 통합한 직후인 1919년 10월 11일 촬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각료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출처 독립기념관
역사포커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 선언에 어떻게 '자유 독립'을 관철시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의 영수들이 회의를 하고, 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카이로선언으로 발표했다. 이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한국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중요한 선언이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카이로선언에 한국의 자유 독립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장개석을 움직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카이로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얻어낸 성과였다는 말이다.
한시준(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인터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역사를 반추해 미래를 보다
2019년은 대한민국에 특별한 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3·1운동은 남녀노소, 계층을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진행된 저항 운동이었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지난해부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관련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김현철 연구위원을 만나 연구 사업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대담(윤현주 작가)
역사인물
삼균주의와 민주공화국을 희망한 조소앙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회의 진행, 국호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정부 각 원의 구성과 각종 선포문 제정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관내에서 추진되고 있던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삼균주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작업도 수행했으며, 1941년에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전략과 국가 건설 계획을 구체화한다.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 조소앙의 업적이다.
김기승(순천향대학교 향설나눔대학 교수)
재단 새 책
역사정의의 과제로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조명하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21세기 현시점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일제 식민지배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된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닦아드리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한 전제에서 우리 정부가 2018년 73주년 광복절에 앞서,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8월 14일을 국가기림일로 제정함으로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 회복을 국가의 책무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2005년 UN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피해자권리 기본원칙’ 상 피해자 중심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환(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재단 새 책
『한원翰苑』의 역주서 발간
최근 재단이 펴낸 『역주 한원(翰苑)』은 ‘6∼7 세기판(世紀版) 동이전(東夷傳)’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660년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 장초금(張楚金)이 찬술(撰述)하고 옹공예(雍公叡)가 주(注)를 붙인 것으로 본래 30권이었지만1) 현재는 그 마지막 권으로 여겨지는 번이부(蕃夷部) 1권만이 유일하게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에 남아 있다.2)
이성제(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장)
시민사회
차별과 무관심 속에 흔들리는 ‘재일 조선학교’
일본정부가 2019년 10월부터 ‘어린이보육지원법’을 각의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이어 ‘유아교육 무상화’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조선 유치원’은 제외됐다. 고등학생뿐 아니라 유치원 아동들까지 ‘법과 제도의 평등한 보호’에서 밀려난 것이다. 2010년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 정책이 시행될 당시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이던 마에카와 키헤이는 이를 ‘관제 헤이트정부가 주도하는 혐오·차별’라고 이야기한다. 2010년부터 일본에서는 국가가 자국에 거주하는 소수집단을 법과 제도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잔혹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관제 헤이트’를 넘어 ‘관제 이지메’, ‘관제 인종차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일본의 시스템을 논하기 전에 그 대상이 유독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김명준(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 / 영화 ‘우리학교’ 감독)
3ㆍ1 운동 100주년 다시보기
사진으로 보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풍경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와 관련한 학술회의와 전시회, 언론의 기획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방송과 신문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당시의 시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혹여 눈이 밝은 시청자나 독자라면 아래의 사진을 여러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 1과 2가 언제 어디에서 열린 시위를 촬영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한문 앞의 만세시위 사진이다.’라는 설명이 가장 자세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두 사진 어디에도 대한문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낯선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육지측량부가 1915년 측도해 발행한 서울 지형도를 보면, 대한문 인근 지금의 서울 도서관(구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경성일보사가 위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필동에 있던 경성일보사는 1914년 10월 17일 현재의 서울 도서관 위치로 사옥을 이전한다. 1915년 11월 18일 화재로 당시 목조로 지어진 건물의 절반이 소실되어 1916년 10월 1일 새로운 사옥을 지었는데 사진 속의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사진 속의 장소는 대한문(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으로 특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촬영 일자는 확정할 수 없을까? 이는 1920년 뉴욕의 Abingdon Press에서 발간된 신흥우의 『The Rebirth of Korea』에 실린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앞의 사진 2장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3에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덕수궁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The Rebirth of Korea』는 배재고보 학당이던 신흥우가 1919년 3월 미국 오하이주에서 열린 미 감리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한 후 여러 곳에서 행한 강연문을 모아 펴낸 책이다. 신흥우는 3·1운동 당시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3월 1일 시위에 참가하거나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19년 10월에 쓴 이 책의 서문에서 정부 기록과 공식적인 진술, 신뢰할 만한 문서와 증언에 따라 서술했음을 밝히고 있어 사진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위의 사진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에서 열린 만세 시위 모습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서현주(재단 교육홍보실장)
재단뉴스
재단 뉴스
재단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초·중·고등학교의 교육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학생 및 교사용 수업자료를 개발하여 온라인에서 배포했다. 이번 3·1운동 수업자료는 사료 중심의 탐구·활동형 학습자료로 학생용과 교사용으로 구성되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기념사업이 수행되는 가운데, 미래 세대의 주역인 초·중·고교 학생들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의미와 가치, 3·1운동의 의의를 폭넓게 이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수업자료는 재단 동북아역사넷(contents.nahf.or.kr)에서 회원가입 없이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