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3ㆍ1 운동 100주년 다시보기
사진으로 보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풍경
  • 서현주(재단 교육홍보실장)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나이,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전 계층이 참여한 이 운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었다. 올해 새 연재코너 <다시 보는 3·1운동>에서는 100년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3·1운동 가운데 많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와 관련한 학술회의와 전시회, 언론의 기획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방송과 신문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당시의 시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혹여 눈이 밝은 시청자나 독자라면 아래의 사진을 여러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접했을 것이다.

 

다시 보는 3.1 운동

 

그런데 사진 1과 2가 언제 어디에서 열린 시위를 촬영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한문 앞의 만세시위 사진이다.’라는 설명이 가장 자세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두 사진 어디에도 대한문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낯선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육지측량부가 1915년 측도해 발행한 서울 지형도를 보면, 대한문 인근 지금의 서울 도서관(구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경성일보사가 위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필동에 있던 경성일보사는 1914년 10월 17일 현재의 서울 도서관 위치로 사옥을 이전한다. 


다시 보는 3.1 운동

 

 

 

 

 

1915년 11월 18일 화재로 당시 목조로 지어진 건물의 절반이 소실되어 1916년 10월 1일 새로운 사옥을 지었는데 사진 속의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사진 속의 장소는 대한문(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으로 특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촬영 일자는 확정할 수 없을까? 이는 1920년 뉴욕의 Abingdon Press에서 발간된 신흥우의 『The Rebirth of Korea』에 실린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앞의 사진 2장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3에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덕수궁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The Rebirth of Korea』는 배재고보 학당이던 신흥우가 1919년 3월 미국 오하이주에서 열린 미 감리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한 후 여러 곳에서 행한 강연문을 모아 펴낸 책이다. 신흥우는 3·1운동 당시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3월 1일 시위에 참가하거나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보는 3.1 운동

 

하지만 1919년 10월에 쓴 이 책의 서문에서 정부 기록과 공식적인 진술, 신뢰할 만한 문서와 증언에 따라 서술했음을 밝히고 있어 사진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위의 사진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덕수궁 밖 경성일보사 앞에서 열린 만세 시위 모습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보는 3.1 운동

 

사진 4에는 ‘미 영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만세를 외치는 수많은 한국인 시위대 행렬’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담장과 덕수궁 석조전의 윗부분, 영사관 건물이 배경에 나타난다는 추가 설명은 이 사진의 배경을 현재의 미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잇길로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르게 길 끝에 있는 서양식 건물과 왼편의 미국 영사관 담장이 현재보다 뒤로 물러나 있는 점도 보여 이를 단언할 수는 없게 만든다. 그런데 앞의 지형도를 다시 보면 석조전 왼편에 돈덕전이 있고, 미 영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사이에는 도로와 건물, 다시 도로(지금의 정동길)가 나있다. 돈덕전은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황실의 주요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다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훼철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지형도에 네모로 표시된 부분의 만세 시위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사진을 찍은 날짜는 언제일까?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당시 서울 지역 시위 현황을 살펴보면 미국 영사관 앞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3월 1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흥우의 책에서도 3월 1일 군중들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 거리 행진을 했는데, 대한문과 외국 영사관(미국과 프랑스), 조선총독부 방향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1919년 3월 1일 미 영사관에 갔다가 내려오는 시위대의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진에 나타나는 경성일보사 앞과 석조전 옆 골목의 시위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학생들과 두루마기를 걸친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대열을 이뤄 이동하며 양손을 높이 들어 만세를 외친다. 화기나 칼 등 어떤 종류의 공격 무기도 가지지 않은 채 거리를 행진하는 이 사람들 속에 약학교 학생이던 박희창(朴喜昌)도 있었을 것이다. 경북 상주군에서 올라와 연지동에서 살고 있던 21살 청년은 당일 오포 소리를 듣고 종로청년회관 앞에 갔다가 누군가 주는 선언서를 받았다.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자 기뻐서 만세를 부르며 무교정에서 대한문, 미국 영사관, 배재학당 앞, 대한문, 종로 네거리, 흥화문, 조선보병대, 프랑스 영사관을 거쳐 조선은행을 지나 본정2정목(지금의 충무로 2가)까지 갔다가 본정2정목 파출소 앞에서 체포되었다.(『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13,「3·1 독립선언 관계자 심문조서-박희창 심문조서」)헌병 경찰에 의해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이날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수만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박희창을 포함한 시위대 134명과 독립선언서 서명자 29명이 체포되어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