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 조소앙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회의 진행, 국호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정부 각 원의 구성과 각종 선포문 제정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관내에서 추진되고 있던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삼균주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작업도 수행했으며, 1941년에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전략과 국가 건설 계획을 구체화한다.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 조소앙의 업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근거를 제시한 「대동단결선언」
1917년 7월 신규식,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국외 독립운동자 대표 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에는 주권 불멸론과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론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정립하였고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했다. 다시 말해 「대동단결선언」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되 국민주권주의에 의거한 새로운 임시정부를 국외 독립운동자들이 조직하자는 주장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대한 독립의 길을 모색하다
조소앙 등은 「대동단결선언」에서 국민주권주의 원칙을 밝혔으며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주의 세력과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국민주권주의와 함께 인류의 보편적 정의와 평등주의에 기초한 인류사회의 대동 평화를 독립운동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제시한다. 이후 한국사회당 대표 명의로 만국사회당 대회에 한국의 독립을 지원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지만 「대동단결선언」에 호응해오는 국외 독립운동 세력은 없었다. 만국사회당 대회에서도 참가 허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1917년 임시정부 수립 시도는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1918년 연말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었고 김규식은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은 국내외로 사람을 보내 일치된 독립운동을 요청하고 길림 지역에 있던 조소앙은 이 요청에 따라 여준, 정원택 등과 함께 대한 독립의군부를 조직,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조소앙은 국외 독립운동자 39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서 한국의 독립은 ‘전제와 강권’의 시대를 벗어나 ‘평등과 평화’의 시대에 인류의 대동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독립운동은 ‘남녀평등’, ‘빈부 평등’, ‘지우(智愚) 평등’, ‘노유(老幼) 평등’을 기치로 내세우는 평등주의 운동임을 역설하였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1조에 기록된 민주공화국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 지역의 인사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모이자, 조소앙은 길림 지역 대표로 참석한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회의에 참석한 조소앙은 신익희, 이광수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 심의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헌장을 기초한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을 명시하며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3조와 4조에서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으며 일체 평등함”,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서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을 규정했고, 5조에서는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을 명시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주의에 의거 국민의 참정권과 자유가 보장되며, 사회경제적으로 평등이 실현되는 민주 공화제 국가임이 선언되었다. 이어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명의로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선포문」의 「정강」 제1항에 “민족 평등, 국가 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을 명시하며 평등주의를 정강의 첫 번째 항목으로 제시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국민주권주의에 의거한 민주주의 원칙과 함께 사회경제적 평등주의를 민주공화국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평등주의 가치에 주목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부 수립 작업이 끝난 직후 5월 유럽에 가서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계를 대상으로 한 독립 외교를 활발히 전개했다. 또한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주자대회(제2인터내셔널)에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식의 자본주의나 소련식의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정부임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요청에 따라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서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승인했고 한국을 국제연맹에 가입시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민주공화국
앞에서 확인했듯,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표현된 평등주의 요소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평등주의를 수용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20년대 한살임당 계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30년대 조소앙은 좌우익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위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과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삼균주의를 독립운동 지도이념으로 체계화한다. 그리고 1941년 11월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였다. 이것은 1940년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조소앙이 사용한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종합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균등 사회가 실현되는 것, 더 나아가 국민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화합하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