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단이 펴낸 『역주 한원(翰苑)』은 ‘6∼7 세기판(世紀版) 동이전(東夷傳)’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660년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 장초금(張楚金)이 찬술(撰述)하고 옹공예(雍公叡)가 주(注)를 붙인 것으로 본래 30권이었지만1) 현재는 그 마지막 권으로 여겨지는 번이부(蕃夷部) 1권만이 유일하게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에 남아 있다.2)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뒤, 『한원』은 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아 왔다. 현재 남아있지 않은 한국고대사 관련 기록들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641년 당의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를 염탐하고 돌아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고려기(高麗記)』 역시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 학계의 『한원』 연구는 미진했다. 남아 있는 『한원』은 필사본으로 오탈자와 연문(衍文)이 유난히 많은 사서다. 그만큼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원문의 교감, 문장의 표점, 체제와 구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우리 학계는 기초적인 연구 없이 사료를 이용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재단은 자료의 기초적 검토 작업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한원』의 역주를 기획연구의 과제로 선정해 공동 연구를 추진하였다. 『역주 한원(譯註 翰苑)』은 필사본의 글자 하나하나를 교감한 뒤, 표점을 찍어 문장을 구분하고 적확한 해석과 설명을 넣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특히 그동안 나온 중일(中日)의 교감본 모두를 대교(對校)해 원문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발간을 통해 우리 학계는 신뢰도 높은 원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한원』 번이부는 고구려와 백제·신라·왜국을 비롯해 말 그대로 당의 사방에 존재했던 15개 세력을 담고 있다. 흉노(匈奴)로부터 시작하는 각 조의 내용은 큰 글자로 쓴 변려문(騈儷文)의 정문(正文)과 그 아래에 협주(夾注)로 넣은 2행의 주문(注文)으로 구성된다. 정문은 4·4자나 4·6자 등의 단문(短文)이 대구(對句)를 이루며 사서(史書)의 서사적(敍事的) 문장과 달리 함축적인 운문(韻文)으로 되어 있다. 주문은 정문의 전거가 되는 문헌과 그 수록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자면 고려조의 주문에는 『고려기』와 같이 동시대 고구려의 제도와 사회를 보여주는 자료를 담고 있다. 그동안 학계의 관심이 주문에 집중되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구진들은 인용 자료들이 중요한 만큼 이들 사료가 어떤 기준에 의해 채록되었으며, 그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 아래 『역주 한원』은 번이부 전편에 대해 역주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유독 고구려‧백제‧신라 조에는 『한원』이 편찬되던 660년 무렵의 자료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기』·『괄지지(括地志)』·『수동번풍속기(隋東藩風俗記)』 등 삼국에 대한 최신 정보들이었다. 『한원』의 편찬이 당의 동방의 경략과 관련해 이들 국가에 대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원』에는 현존하지 않는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는 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문과 주문의 유기적 관계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것도 『역주 한원』이 거둔 성과다. 예를 들어 고려조의 정문 가운데 하나인 “波騰碧㶑, 騖天險以浮刀(파도가 짙푸른 물결로 솟아올라, 천험을 질주하니 조각배를 띄웠고)”는 압록강(鴨綠江)의 형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여기에 보이는 ‘浮刀’란 주문의 ‘刀, 小船也.(도는 작은 배다).’라는 설명 없이는 유추가 불가능하다. 정문만으로는 도저히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처음부터 정문과 전거가 되는 주문이 동시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문과 주문의 작성 시기를 달리 보아온 선행연구의 오류를 확인하는 동시에 더욱 정확한 해석문을 작성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수십 차례의 독회(讀會)를 거쳐 역주본이 만들어졌지만, 사서의 서사체에 익숙한 연구자들에게 운문의 정문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덧 교정 단계에 이르렀지만 각 정문의 해석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165개의 정문을 일일이 주문 내용과 비교하고 대구의 맥락을 살펴 해석문을 바로잡는 것은 필자의 몫이었다. 구절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지만, 특히 고구려 봉황산성(鳳凰山城)의 험준함을 묘사한 “焉骨巉巖, 竦二峯而功漢”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에서 ‘漢’은 무얼 가리키는지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한’이란 주문의 ‘형문(荊門)과 삼협(三峽)(중국 사천성과 호북성 경계에 있는 험준한 협곡)’이 위치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곳이 漢水(중국 화중지방을 흐르는 강)임을 찾아내 '언골[산]은 가파르고 험준하며, 두 봉우리를 우뚝 세워 한[수의 형문·삼협]처럼 만들어 졌고'라고 풀어 낼 수 있었다. 책을 펴내기까지의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지만 순간순간 느꼈던 성취감은 두고두고 떠오를 듯하다.
<각주>
1. 『구당서舊唐書』 장초금전(張楚金傳)에 “著翰苑三十卷, 紳誡三卷, 並傳於時.”라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유서류(類書類)에 ‘翰苑七卷’, 總集類에 ‘翰苑三十卷’으로 언급하고 있다. 유서와 총집 두 종류의 한원이 있고 그 권수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891년 찬술된 후지와라 노스케요(藤原佐世)의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 기록을 통해 한원이 30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1917년의 다자이후 텐만구 보물조사에서 발견되어 1954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