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유 독립',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의 영수들이 회의를 하고, 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카이로선언으로 발표했다. 이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한국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중요한 선언이었다.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카이로선언에 한국의 자유 독립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장개석을 움직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카이로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얻어낸 성과였다는 말이다.
임시정부를 긴장시킨 국제공동관리
국제열강들 사이에 전후 한국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미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였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미국의 국무부 관리와 국제관계학자들은 전후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논의하고 있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한국은 국제공동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국제공동관리란,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국제열강들이 공동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말한다.
국제공동관리 문제가 대두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장했다. 일제가 패망해도 한국은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국제열강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공동관리에 대한 내용과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 외무부장 명의로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3년 2월 외무부장 조소앙이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그 즉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일제에 이어 국제열강들이 한국을 통치한다고 하면, 30여 년 동안 일제에 대항해 싸웠듯이 열강들에 대해서도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국제공동관리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43년 3월 미국을 방문한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때 루스벨트가 만주·한국·인도차이나·대만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국은 전후 국제공동관리하자는 것을 제의하였고, 이든이 이에 찬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The Chicago Sun»의 4월 27일 자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
소식을 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협의했다. 미·영·소 각국 원수에게 국제공동관리에 반대하는 전보를 보낼 것, 각종 언론을 통해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 그리고 외무부가 나서서 중국 외교부에 구체적인 실상과 내용을 알아볼 것과 중국의 주요 인사들을 찾아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이에 반대해 줄 것을 요청하자는 것 등이 결정되었다.
반대운동을 위해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 독립운동 단체 및 한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1943년 5월 10일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하여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우익의 정당 및 단체 등 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어떠한 외래간섭도 반대한다”는 성명서와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위해 우리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를 각 동맹국 원수들에게 보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중국의 각계 인사들을 찾아다녔다. 중국 정부가 나서서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해주도록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조소앙· 신익희 등은 중국의 외교부 인사를 비롯하여 입법원장 손과(孫科), 행정원장 우우임(于右任) 등을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장개석과 루스벨트 사이에 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였다.
장개석, 루스벨트의 회담 교섭
당시 장개석과 루스벨트 사이에 회담 교섭이 추진되고 있었다. 회담 교섭은 루스벨트가 장개석에게 만날 것을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미국은 일본과 전쟁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습격당해 군함 대부분이 바다에 가라앉았고, 태평양 일대의 많은 섬들을 일본이 차지한 것이다. 일본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중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장개석과 만나자고 한 것이다.
중국의 도움이란 일본군을 중국대륙에 묶어두는 것을 말한다. 미국으로서는 일본군을 중국대륙에 묶어두는 것이 유리했다. 만일 장개석이 일본에 항복하거나 타협한다면, 중국대륙에 있는 일본군이 태평양지역으로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장개석을 만나 미국이 군사 물자를 원조해줄 터이니 일본과 열심히 싸울 것을 요청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장개석에게 만날 것을 제의한 것은 1942년 12월이었지만, 본격적으로 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43년 6월부터였다. 이후 루스벨트와 장개석 사이에 회담 장소, 시기, 참석자 등을 둘러싸고 교섭이 이루어졌다. 교섭이 성사된 것은 10월 말이었다. 장소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기는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참석자는 루스벨트·장개석·처칠로 결정되었다.
임시정부,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하다
장개석이 루스벨트와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개석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은 성사되었다. 1943년 7월 26일 오전 9시 주석 김구·외무부장 조소앙·선전부장 김규식·광복군 총사령 이청천·부사령 김원봉이 통역으로 안원생을 대동하고, 중국군사위원회 2층 접견실에서 장개석을 만났다. 당시 장개석의 공식직함은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개석을 만나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측에서 작성한 <總裁接見韓國領袖談話紀要>(사진 자료 참고)라는 문건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개석에게 ‘미국과 영국이 주장하는 국제공동관리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관철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미국과 영국이 이미 국제공동관리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개석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국의 완전 독립을 돕겠다’며 ‘중국은 힘써 싸우겠다(中國力爭)’고 대답했다.
약속을 지킨 장개석
장개석은 약속을 지켰다. 회담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다고 한 것이다. 중국은 회담에서 제안할 내용들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군사위원회 참사실과 국방 최고위원회 비서청에서 별도로 준비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두 곳 모두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장개석도 그랬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장개석일기>가 공개되었는데, 회의에서 제안할 사항들 속에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적어 놓은 것이다. 장개석은 카이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했다. 1943년 11월 23일 저녁 장개석은 루스벨트 숙소에서 만찬을 가졌다. 참석자는 장개석과 송미령,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Harry L. Hopkins) 네 사람이었다. 이때 일제가 패망하면 만주· 대만· 팽호도 등 일제가 강탈한 영토는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난 후 보좌관 홉킨스에게 장개석과 논의한 내용을 근거로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초안은 홉킨스가 작성했다. 홉킨스는 다음 날인 11월 24일 오전 백안관 문서기록관인 코넬리우스(Albert M. Cornelius)를 불러 타이핑을 하도록 하여 초안을 만들었다. 이를 루스벨트에게 보여주고 수정을 받았다. 그리고 24일 오후 홉킨스는 초안을 가져와 국방 최고위원회 위원장으로 장개석의 비서 역할을 담당한 왕총혜(王寵惠)에게 건넸다. 왕총혜는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장개석에게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전날 저녁 루스벨트와 협의한 내용이 모두 포함된 것을 확인하고, 이에 동의했다.
중국과 영국, 한국의 독립을 두고 설전을 벌이다
영국 측은 11월 25일 초안을 받았다. 영국 외무장관 이든과 차관 카도간(Alexander Cadogan)이 24일에 도착한 때문이었다. 영국 측은 초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초안이 중국 측에 먼저 전달되었다는 점도 그렇고, 중국에 주는 선물이 너무 크다는 점 때문에도 그랬다. 영국 측은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도서들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점령했거나 차지한 것’ 등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영국 측의 불만이 또 있었다. ‘한국의 자유 독립’에 대해 불만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파란이 일어났다. 11월 26일 합의안을 확정 짓기 위해 3국의 실무자들이 모였다. 이때 영국 측이 초안에 들어있는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한다’는 내용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수정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와 버마를 비롯하여 태평양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할 경우, 자신의 식민지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측의 수정 제의에 대해 왕총혜가 반대하고 나섰다. 왕총혜는 “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병탄 되었고, 일본의 대륙침략은 한국을 병탄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단지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선언에 이를 포함하는 것은 중국 및 원동 방면으로 볼 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등의 이유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영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카도간은 “영국은 내각에서 한국독립에 대해 토론한 일이 없다”, 그리고 “소련의 한국독립 문제에 대한 태도와 반감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한국독립에 관한 것을 모두 빼버리자”라고 했다. 영국의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초안에 들어있는 ‘한국의 자유 독립’이란 문구를 전부 빼버리자고 한 것이다. 한국독립 문제를 두고 중국과 영국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수습한 것은 미국의 실무자인 주소련 미국대사 해리만(Harryman)이었다. 해리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의견으로 볼 때 한국독립 문제에 대해서 소련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특별히 소련과 협의할 필요도 없다”고 발언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의견이란, 11월 23일 만찬에서 장개석이 제의한 한국의 자유 독립에 동의한 것을 말한 것이다.
카이로 선언,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하다
카이로회의는 11월 26일에 끝내기로 되어 있었다. 루스벨트·처칠·장개석·송미령이 참석하였고, 이들은 실무자들이 합의안을 만들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자들이 공방을 벌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정상들은 이들을 불러, 협의한 내용을 낭독하도록 했다. 한국독립 문제에 이르렀을 때, 루스벨트가 나섰다.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의 의견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낭독을 마치자 3국 영수들은 찬성한다고 했다. 이로써 한국 문제가 카이로선언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26일 카이로선언이 채택되었지만, 이는 곧바로 발표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이 카이로회의에 이어 테헤란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을 갖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은 11월 27일 귀국길에 올랐고,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떠났다. 테헤란에서 미·영·소 3국 정상들이 회담을 가졌다. 이때 스탈린은 카이로선언을 확인하고 이에 동의한다고 했다. 이로써 카이로선언은 미·영·중·소 4개국 영수들의 동의를 얻어, 12월 1일에 발표되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였지만, 한국은 즉각 독립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과 싸워 이긴 나라였다. 이들은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일본과 싸워 승리했다. 그 전리품으로 한반도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국을 영원히 차지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통치하지도 못했다. 3년 만에 물러났다. 카이로선언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가 패망한 후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은 것으로, 우리 민족은 1919년에 건립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게 되었다. 올해는 그 100년을 맞는 해이다. 100년을 기념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카이로회의에서 독립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거둔 성과였다는 점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